정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기금을 국내 기업 단독으로 조성한다는 안을 발표하자, 6일 저녁 서울광장에서 이에 항의하는 긴급촛불집회가 열렸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억울해서 지금은 죽지도 못한다. 굶어 죽어도 이런 식으로 안 받겠다.”
미쓰비시중공업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93)씨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광주광역시 5·18민주광장을 가득 채웠다. 6일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기금을 국내 기업 단독으로 조성하겠다고 공식 발표하면서다.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는 이에 항의하는 촛불집회를 열고 국회에서 비상시국선언을 예고하는 등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피해자 대리인단도 정부안에 맞선 법적 대응에 나설 방침이어서 시민사회 전반에 걸친 저항 운동으로 불붙을 조짐이다.
이날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일본제철·미쓰비시 피해자와 유족을 대리하는 대리인단은 “윤석열 정부는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외교적 성과에 급급해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이 아닌 ‘기부금’을 받으라며 부당한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민사회단체도 정부안에 반발하며 향후 행동을 예고했다. 이날 오전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박진 외교부 장관의 정부 해법 발표 시각에 맞춰 아프리카 전통 악기인 부부젤라를 불고 함성을 지르는 등 항의 퍼포먼스를 했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때도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박근혜 정권을 심판했다”며 “피해자가 반대하고 대법원 확정판결이 있는데 무슨 권리로 윤석열 정권은 이런 망동을 저지르느냐”고 규탄했다. 단체는 7일 국회에서 피해자들과 함께 비상시국선언을 열고 주말 항의 집회도 진행할 예정이다.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기금을 국내 기업 단독으로 조성하는 '제3자 병존적 채무 인수' 방안으로 하겠다고 발표한 6일 오전 서울 도렴동 외교부 앞에서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관계자들이 긴급 항의행동을 열어 '반인권∙반헌법∙반역사적 강제동원 굴욕해법' 강행을 규탄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정부안 발표를 보고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기도 했다. 이날 저녁 7시30분 서울광장에서 열린 긴급촛불집회에 참여한 직장인 이지영(35)씨는 “아침에 뉴스를 보고 너무 화가 나 집회에 왔다”며 “피해자들이 제대로 사죄도, 배상도 받지도 못했는데 대통령이 마음대로 처리해 (일본에) 면죄부를 줬다”고 말했다. 대학생 안지원(21)씨는 학내 역사 동아리원 10명과 함께 집회에 왔다. 그는 “피해자분들이 아직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정부가) 대놓고 굴욕적인 외교를 펼치는 게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지 않느냐”고 말했다.
일본경제단체연합회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함께 조성하기로 한 ‘미래청년기금(가칭)’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광주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등은 “피해자와 지원단체가 2010년 7월부터 2012년 7월까지 미쓰비시중공업과 16차례 교섭할 당시 미쓰비시 쪽이 제시한 안과 동일하다”고 짚었다.
법률적 대응도 함께 진행된다. 피해자 대리인단은 ‘제3자 변제’라는 정부안에 동의하지 않는 피해자들을 위해 전범기업 자산의 현금화를 위한 집행 절차를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이들은 “정부 해법에 동의하지 않는 피해자에 대해 한국 정부가 공탁 등을 통해 채권을 일방적으로 소멸시킬 수 없고, 만약 행정안전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방적으로 금전을 공탁한다면 무효를 확인하는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금을 일본 기업은 빠진 채 국내 기업 등 민간의 자발적 기여로 마련한 돈으로 지급하는 ‘제3자 병존적 채무 인수’(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한 6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 5·18민주광장에서 강제징용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와 지원단체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회원들이 정부 합의안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정부의 이번 해법은 대한민국 행정부가 대한민국 사법부 판결을 무력화시킨 ‘사법 주권의 포기’이자, 자국민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한 ‘제2의 을사늑약’이다”고 주장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대리인단은 피해자와의 소통 노력을 부각하며 해결책을 도출해냈다는 외교부 태도도 비판했다. 김세은 변호사는 “정부는 이미 정해진 안이 있었고, 피해자들에게 두루뭉술한 설명을 했을 뿐이다. 정부안에 반하는 의견에 대해선 답변이 없었다”고 했다. 임재성 변호사는 “정부안은 피해자와 행안부 재단의 국내 문제로 전환하려는 것 같지만, 여전히 확정판결의 권리를 행사할 방법은 많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정부안을 수용할 뜻이 있는 피해자들의 의사도 존중해 이들에 대해선 정부 협의를 거쳐 채권 소멸 절차를 따로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대리인단 확인 결과, 현재 생존한 이춘식(일본제철), 양금덕·김성주(미쓰비시)씨 모두 정부안에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김세은 변호사는 “서울과 광주에서 진행중인 소송 원고 15명 중 명시적으로 정부안 찬성 의사를 밝힌 건 4명으로 과반이 넘지 않는다”며 “정부가 보상안에 과반 이상의 피해자가 호응하고 있다고 발표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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