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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92살 최고령 박사 “러닝머신 주3회, 학교 앞 공부방 얻기도”

등록 2023-02-22 08:00수정 2023-02-23 01:22

국내 최고령 박사 이상숙 선생, 87살에 사회학 몰두
“알바하며 공부하는 동료들에 떳떳한 학우 되고 싶었다”
성공회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며 국내 최고령 박사인 이상숙(92)씨가 16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정보과학관에서 열린 2022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성공회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며 국내 최고령 박사인 이상숙(92)씨가 16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정보과학관에서 열린 2022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난 16일 2022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이 열렸던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학사와 석사 학위수여자 호명이 20분 가까이 이어지던 강당이 삽시간 술렁거렸다. 허리가 굽은 백발의 여성이 무대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참석자 사이에서 “어머” 하는 감탄사가 오갔다.

“성명 이상숙. 위 사람은 동교 대학원 사회학과를 이수하고 박사 학위 자격을 얻었으므로 이를 인정함.” 이상숙(92)씨가 환한 미소로 학위 수여증을 받아들자, 참석자 사이에서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씨의 지도교수는 허리를 숙여 이 선생을 껴안았다.

이날 5년 동안의 석·박사 공부를 마치고 졸업한 이씨는 국내 최고령 박사 학위 취득자다. 2018년 성공회대에서 사회학 석사 과정을, 2020년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20일 서울 광진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씨는 “5년 동안 밥 먹고 공부하고 논문 쓴 것밖에 없다”며 “주변의 도움으로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30살 숙명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뒤, 정부가 한국전쟁 유족들의 직업교육을 위해 만든 서울모자원의 수예교사로 일을 시작했다. 모자원의 바자회를 방문한 미군 고위관계자의 권유로 군마트(PX)에서 수예품을 파는 점포를 운영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자그마한 상점에서 시작한 사업은 점차 번창해 완구회사 ‘소예산업’으로 거듭났고, 한때 ‘수출 여왕’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여성 경영인이 소수였던 시절, 이씨는 인정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혼자 인형 샘플을 담은 트렁크를 끌고 해외 박람회를 다녔어요. 가끔은 벅차 호텔방에서 몰래 울었죠.” 30년 동안 맡아온 경영에서 물러난 뒤에도 여성경제인협회장과 숙명여대 총동문회장 등 사회활동을 끊임없이 했다.

쉴 틈 없는 날을 보내면서 마음 한편에는 사회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경영자 공부모임에서 만난 사회학 교수들은 사회 현상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 듯 보였다. 노동운동이 일어나고 노동조합과의 갈등이 있을 때 해법을 묻기도 했다.

성공회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며 국내 최고령 박사인 이상숙(92)씨가 16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정보과학관에서 열린 2022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에서 학위증서를 받고나서 지도교수와 포옹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성공회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며 국내 최고령 박사인 이상숙(92)씨가 16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정보과학관에서 열린 2022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에서 학위증서를 받고나서 지도교수와 포옹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이씨를 도전하게 한 것은 딸이었다. 2018년 1월, 딸 황옥(69)씨가 대뜸 그에게 성공회대 정문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딸이 가자는 곳에는 입학홍보처 관계자가 앉아있었다. 이씨의 ‘사회학도 꿈’을 기억해둔 딸이 고 신영복 교수가 재직했던 성공회대를 점찍어둔 것이다.

“근데 어떡하죠. 원서 접수 마감이 1시간 남았어요.” 입학홍보처 관계자의 말에 이씨는 딸과 함께 대학 내 건물 컴퓨터로 입학원서를 작성했다. “마감을 5분 남기고서야 딸이 제 의사를 확인하더라고요. 그렇게 난데없이 공부를 시작했어요.”

이씨는 박경태 교수의 ‘소수자 연구’ 첫 수업 날을 잊을 수 없다. ‘소외된 사람’이라는 어렴풋한 인상 외에는 ‘소수자’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다만 청년으로 가득 찬 강의실에서 자신이 소수자 같다고 생각했다. 멋쩍음을 뒤로하고 “저는 이 수업에서 소수자니 잘 봐달라”는 자기소개를 건넸다. 강의실이 웃음으로 뒤덮였고, 그제야 마음이 풀렸다.

그래도 사회학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마르크스, 뒤르켐 등 계속해 튀어나오는 사회학자의 이름이 버거워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럴 때마다 김진업 교수가 했던 “선생님이 교실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말이 그를 다잡게 했다.

이씨는 온 마음을 공부에 쏟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는 젊은 동료들을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았다. 학교 앞 공부방과 기숙사를 얻어 지냈다. 매주 세 차례씩 피트니스 센터에 출석해 러닝머신 위를 뛰었다.

“매우 엄정한 학생이었어요. 컴퓨터로 치르는 시험도 시간 내에 정확히 작성했고, 논문도 자처해 여러 번 수정을 거듭하셨죠.” 지도교수였던 박경태 교수가 말했다. 그렇게 완성한 논문 <인간 예수의 ‘혁명적 순종’이 갖는 정치 윤리와 레비나스의 케노시스론>이 심사를 통과하며 이 선생은 박사가 됐다. 이쯤 되면 쉬고 싶을 텐데, 논문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쓰고 있다.

“성공회대에서는 소수자로 실수하더라도 부끄럽지 않고 외롭지 않았습니다. 일에 찌들었던 피로가 모두 벗겨지는 듯했습니다. 적지 않은 휴식의 기회가 됐다고 실감합니다.” 이씨가 졸업식에서 말했다. 가족과 회사, 사회를 위해 살아온 이씨에게 지난 5년은 자신에게 몰입했던 둘도 없는 시간이었다.

성공회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며 국내 최고령 박사인 이상숙(92)씨가 16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정보과학관에서 열린 2022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에서 같이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성공회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며 국내 최고령 박사인 이상숙(92)씨가 16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정보과학관에서 열린 2022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에서 같이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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