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임보라 목사가 지난 2014년 12월 23일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개소식 때 축사를 하고 있다. 정민석 ‘띵동’ 대표 제공
지금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도 너무 하시지, 왜 하필 임보라 목사님을 데려가셨는지 한탄스럽기만 합니다. 지난 4일 부고를 들은 순간부터 너무나 갑작스러워 현실 감각마저 사라져버렸습니다. 처음엔 ‘목사님 아는 분이 돌아가셨나’ 생각했었는데, 본인상이라니요. 55살에 가시다니요.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쓸어 담지도 못하겠습니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며 수많은 부고를 접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차별과 혐오를 이기지 못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임 목사님께서는 늘 함께해주셨습니다. 임 목사님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기도를 할 때마다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정작 사과해야 할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고 신앙의 이름으로 정죄를 논했을 때도 임 목사님은 늘 먼저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저에게도 큰 힘이 되어 주셨는데, 이제는 서로를 토닥이며 슬픔을 나눴던 그 시간마저 야속하고 미안해서 목사님의 영정사진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고 임보라 목사의 발인식이 7일 서울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사진 섬돌향린교회 제공
“목사님,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하며 빼꼼히 목사님의 방문을 열 때마다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주셨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천사가 정말 존재한다면, 정말 당신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인권재단 사람과 섬돌향린교회는 한 건물의 위 아래층 이웃이다 보니, 업무시간에도 종종 목사님을 찾아뵙고 사람 이야기, 세상 사는 이야기 등을 참 많이 나누었습니다. 임 목사님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답답한 마음도 사라지고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니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조른 적도 많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임 목사님은 책상에 앉아 일을 볼 시간도 없이 늘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섬돌향린교회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누군가 맞이할 테이블과 그 위에 놓여 있던 작은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를 예쁘게 꾸미고 있던 무지개 아이템의 굿즈들이었으니까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찾아올 때마다 환대하며, 바쁜 시간을 쪼개 그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줬던 분이었습니다. 특히 성소수자 정체성을 숨기고 교회를 다니고 있거나, 목회를 맡고 있는 분들의 어려움을 들을 때마다 도울 방법을 찾아 동분서주하셨던 모습 기억합니다.
무엇보다 임 목사님과는 청소년 성소수자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10년 전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설립을 함께 기획하며 교회 공동체의 역할과 책임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든든하고 힘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없었다면, 그리고 섬돌향린교회 교인들의 참여가 없었다면 지금의 띵동은 없었을 겁니다. 특별 기부금을 모아주는 것부터, 청소년 상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주시는 것까지 목사님이 다 해주셨으니까요. 모든 것이 막연했던 그 시기, 잘 될 거라 격려해주고 늘 곁에 있겠다 약속했던 그 말 덕분에 잘 버텨왔습니다.
차별과 혐오를 마주할 때마다 사람들이 무너지지 않게 손을 내밀어 주고, 온갖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곁에 남아주었던 모습을 생각하니, 당신의 부재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저를 탓하게 되고 한없이 미안해지기만 합니다. 장례식장에 끝없이 찾아오는 조문객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임 목사님이 혐오와 차별이 넘실거리고 재개발과 국가폭력이 난무한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임 목사님이 남겨준 선물은 결국 사람이었구나. 힘겹더라도 앞으로 이들과 함께 살아가면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전히 임 목사님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지만, 꼭 이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임보라 목사님, 저를 살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빛이 되어준 당신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눴던 소소한 일상이 그립습니다. 무엇보다 당신의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습니다.”
정민석/인권재단 사람 활동가·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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