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ㄱ씨는 휴대전화 메신저앱으로 익명의 상대와 영상통화를 하다가 이른바 ‘몸캠 협박’을 당했다. 상대방의 음란 행위 요구에 응했다가 돈을 주지 않으면 녹화한 영상을 지인에게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받은 것이다. ㄱ씨가 요구한 만큼 줄 돈이 부족하다고 하자, 상대방은 공범 2명과 함께 그를 메신저에 초대해 “돈을 못 갚겠으면 현금수거책 역할이라도 하라”고 재차 협박했다.
결국 ㄱ씨는 다음달부터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범죄에 발을 들이기 시작해 피해자 3명으로부터 모두 8천만원가량을 가로채 조직에 건넸다. 덜미가 잡혀 사기방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그는 지난해 9월 1심(부산지법 동부지원)에서 ㄱ씨는 징역 1년6개월 선고를 받았다. 판사도 범행의 시작이 협박이었다는 점을 인지했지만, “피고인은 자신이 불법적인 일에 가담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 사건 각 범행에 가담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29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이 ㄱ씨 사례처럼 몸캠 유포 등의 협박으로 피해자들을 범죄에 끌어 들이는 수법이 최근 재판에서 드러나고 있다. 지난해 5월 서울중앙지법(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지난해 8월 창원지법 마산지원(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3년), 지난해 12월 수원지법 안산지원(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판결 모두 ‘몸캠 협박’ 피해자였지만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판결문을 보면, 실형 선고를 받은 ㄱ씨는 구체적인 금액은 나오지 않았지만 협박을 받은 금액보다 더 큰 범죄 수익금을 일부 나눠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범죄 수익금을 받지 못한채 현금수거책 업무만 하거나(마산지원), 수거책 업무에 더해 추가로 돈을 뺏긴 경우(안산지원)엔 양형에 반영돼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몸캠 협박 피해자를 수거책으로 활용하는 것은 기존 보이스피싱 범죄에선 찾기 힘든 현상이었다. 일선 경찰서 형사과장은 “보이스피싱 조직이 협박을 통해 피해자를 수거책으로 이용하는 경우까지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2021년 경찰대 <경찰학연구>에 실린 ‘보이스피싱 전달책의 가담경로에 관한 연구’(홍순민 경감) 논문을 보면, 현금수거책 가담경로 가운데 구직사이트를 통한 경우가 대부분(70.6%)이었다.
당국의 단속과 처벌이 강화되면서 현금수거책을 구하기 어려워진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새로운 경로로 범죄자 ‘충원’에 나선 것이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이 직접 돈을 받아내기 어려워지자, 피해자를 현금수거책으로 활용하고 있다”며 “과거 돈이 궁한 불법대출 피해자들을 또 다른 범행에 이용한 것과 유사한 형태”라고 말했다.
10년 가까이 보이스피싱을 수사하며 논문을 낸 홍순민 경감은 <한겨레>에 “보이스피싱 범죄는 한번 발을 들이면 재판에서 유죄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몸캠 등으로 협박을 받을 경우 겁먹지 않고 경찰에 신고해야 범죄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다”고 당부했다.
채윤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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