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부문별로 여성과 남성이 느끼는 불평등 요소는 여전히 남아있다. 여성은 경력단절, 고용상 성차별을 꼽았고, 남성은 장시간 근로로 인한 일·생활 불균형 같은 것이 개선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지난 9일 ‘2023년 여가부 주요 업무 추진계획’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양성평등’ 정책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가부는 올해 주요 정책 목표에서 ‘성평등한 사회 실현(구현)’을 지웠다. 앞서 여가부는 ‘다함께 누리는 성평등사회 실현’(2021년), ‘모두가 체감하는 성평등 사회 구현’(2022년) 등을 주요 정책 목표로 제시했지만, 올해는 달랐다. 다만, ‘저성장 위기를 극복할 미래인재 양성’의 세부과제로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 수립’을 약속했다. ‘양성평등’ 정책의 목적이 성평등 사회가 아니라, 미래 인재 양성인 셈이다.
하지만 김 장관이 말한 남성이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나 일·생활 균형을 이루기 위해는 성평등 실현이 필요조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은 성평등 의식 확산과 성별 고용격차 해소, 여성 대표성 제고, 여성폭력 근절 등을 목표로 정부가 5년마다 만드는 정책 꾸러미로, 여가부는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년)을 이달 중 발표할 예정이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10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남성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의 배경으로 가부장적 문화를 꼽았다. 그는 “남성이 가정에서 가장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치관 안에서 남성은 가정에서 돌봄 역할을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 24시간 사업주의 부름에 대기해야 하는 노동자로 간주돼 왔다. 이런 가부장적 문화 안에서 회사가 남성 노동자에게 장시간 노동을 요구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남성을 가사·돌봄 노동에서 배제하는 성별 분업 구조가 남성 노동자를 장시간 노동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뜻이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앞줄 왼쪽)이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올해 여가부 업무계획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제공
대표적인 사례가 남성 직원의 야간 당직 전담이다. 이는 ‘남성 역차별’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된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한 금융회사 직원은 남성만 야간 당직 업무를 맡는 것이 성별을 이유로 한 차별이라며 2021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지난해 10월, 차별이 아니라며 해당 진정을 기각했다. 이 회사의 야간 숙직(저녁 6시∼다음날 오전 9시)과 휴무일(주말 및 공휴일) 일직(오전 9시∼저녁 6시) 업무가 크게 다르지 않고, 야간 숙직 근무자에게 별도의 보상휴가가 주어지는 점 등을 종합했을 때 남성 직원에게 야간 숙직을, 여성 직원에게 휴무일 일직을 하도록 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인권위는 “남성에게 현저히 불리하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여성에게 일률적으로 야간 숙직 근무를 부과한다면 이는 매우 형식적이고 기계적 평등에 불과하다. 불평등한 성별 권력관계 속에서 여성들은 폭력 등의 위험 상황에 취약할 수 있고, 여성들이 야간 시간대에 갖는 공포와 불안감을 간과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특히 인권위는 “과거와 비교하여 여성 직원 수가 증가하고 보안시설이 발전하는 등 여성들이 숙직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면 성별 구분 없이 당직 근무를 편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평등 관점에서 보더라도 남성 중 가족 돌봄 등의 상황에 따라 당직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했다. 남성 직원의 야간 당직 전담 관행은 남성을 표준으로 하는 노동 환경과도 맥이 닿아 있다는 취지다.
성평등 수준은 노동시간과도 관련이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해 7월 발표한 성 격차 지수(GGI·1에 가까울수록 성평등)를 보면, 한국은 0.689로 146개국 중 99위를 차지했다. 1위는 아이슬란드(0.908), 2위는 핀란드(0.860), 3위는 노르웨이(0.845)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공개한 이들 3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아이슬란드 1433시간, 핀란드 1518시간, 노르웨이 1427시간이었다. 모두 오이시디 평균 연간 노동시간(1716시간)보다 낮았다. 성평등 수준이 높은 나라일수록 노동시간도 짧은 셈이다. 반면 한국은 오이시디 회원국 38개국 중 다섯 번째로 연간 노동시간(1915시간)이 길다.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은 “더 많이 일하고, 더 억울하고, 더 힘들다고 말하는 한국 남성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성들과 연대해 함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성평등은 여성들이 남성의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다. ‘남성성’ ‘가장’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와 차별을 파악해야 한다”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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