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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영하 9℃, 벽도 없는 택배 분류장…언 손으로 6시간 ‘까대기’

등록 2023-01-04 07:00수정 2023-01-04 15:16

‘사회적 합의’ 무색…여전히 분류작업
국토부 조사 결과 합의 이행 29%뿐
전국택배노조, 3일부터 분류 거부
3일 새벽 7시께 간선차량에서 내리는 택배상자를 분류하는 로젠택배 용인처인지점 택배노동자들. 채윤태 기자
3일 새벽 7시께 간선차량에서 내리는 택배상자를 분류하는 로젠택배 용인처인지점 택배노동자들. 채윤태 기자

3일 새벽 5시30분. 아직 어둠이 걷히기 전 경기 용인 로젠택배 용인처인지점은 이미 택배 차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길게 ㄴ자로 늘어선 레일 앞에는 패딩점퍼와 장갑, 모자, 방한화로 중무장한 택배노동자 30여명이 차가운 입김을 내뿜으며 ‘까대기’(배송 지역별로 택배물을 분류하는 작업)할 물품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하 9도까지 내려간 이날 작업장 안으로 매서운 바람이 들이쳤다. 찬바람을 막아줄 벽이 없는 분류 작업장 지붕엔 고드름이 달렸다. 화재 위험 때문에 난로 없이 추위를 버티다가, 곱은 손으로 도저히 작업이 힘들 때는 작은 등유 난로에 손을 녹였다.

새벽 6시. 첫 간선운송차량이 싣고 온 택배 물량이 레일로 쏟아져 내려왔다. 택배노동자들은 일제히 상자에 부착된 운송장을 눈으로 ‘스캔’한 뒤 순식간에 맡은 지역 택배 상자만 쏙쏙 빼내 본인 택배차 앞에 쌓았다.

크고 무거운 택배 상자도 두손으로 들어 옮길 여유는 없다. 잠시 한눈팔아도 자신이 배송해야 할 상자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택배노동자 30여명이 11t짜리 차량 6대 분량의 택배물을 모두 분류하는 데 5∼6시간 걸린다. 이 작업은 매일 새벽과 오전 반복된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원인으로 지목된 분류노동이 끝나면 그때부터는 배송노동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날 분류작업은 10분 만에 멈췄다. ‘흰 눈이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이면…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민중가요 ‘사계’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전국택배노조 조끼를 입은 택배노동자 10명이 택배 상자에서 손을 떼고 레일 밖으로 벗어났다. 이들은 택배물 분류를 회사 쪽에서 맡기로 한 사회적 합의 이행을 요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이날 집회 지원을 나온 원영부 전국택배노조 경기지부장은 “2020년부터 과로로 사망한 택배노동자 25명이 분류작업 때문에 죽어갔다. 이들 25명과 택배비를 올려준 국민 덕에 지난해 1월1일부터 분류 도우미가 투입될 수 있게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지만, 1년 넘게 택배노동자들은 직접 분류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제는 절대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3일 새벽 6시께 간선차량에서 내리는 택배상자를 기다리는 로젠택배 용인처인지점 택배노동자들. 채윤태 기자
3일 새벽 6시께 간선차량에서 내리는 택배상자를 기다리는 로젠택배 용인처인지점 택배노동자들. 채윤태 기자

로젠택배는 지난해 6월 2차 사회적 합의에 참여해 다른 택배사들처럼 별도 분류인력을 투입하기로 합의한 당사자다. 하지만 김종엽 로젠택배 용인처인지점장은 다른 택배사와 달리 이곳 기사들은 ‘노동자’가 아닌 각자 사업체를 가진 ‘소장’이기 때문에 분류인력 투입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장여건에 따라 분류인력 투입이 어려울 경우 예외적으로 택배노동자를 분류작업에 참여하게 할 수 있다. 로젠택배 본사 쪽은 “전국적으로 분류인원 200여명이 투입돼 있다. 분류작업을 직접하는 택배기사들에 대해서는 별도 합의한 기준 이상으로 매월 분류비를 지급하고 있다”고 했다.

택배사 지점 및 대리점에서는 분류인력을 충원하기 어려운 이유로 구인난을 꼽고 있지만, 택배노동자들은 분류인력 채용보다 기존 택배노동자에게 분류작업을 시키는 게 편하고 싸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본다.

변태호 전국택배노조 로젠택배 용인처인지점 지회장은 “분류작업 명목으로 월 45만원가량 주는데, 별도 분류인력을 구하려면 더 많은 돈을 줘야 할 것이다. 가장 싸게 먹히는 방식으로 택배노동자에게 과한 노동을 부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용인처인지점 택배노동자 박경득씨는 “분류작업은 하루 택배 노동의 50% 이상에 달하는 중노동이다. 우리는 분류작업을 하고 나서 택배 상자 300∼400개를 배송하러 나가야 한다”며 분류인력 채용을 촉구했다.

이곳 외에도 여전히 택배노동자가 직접 분류작업을 하는 곳은 많다. 조오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국토교통부로부터 받은 현장조사(2022년 1∼8월) 결과를 보면, 분류인력 투입으로 택배 기사가 분류노동을 하지 않는 곳은 29%(현장조사 97곳 가운데 28곳)에 불과했다. 일부라도 분류인력이 투입된 곳은 56%(54곳), 분류인력이 아예 없어 택배노동자가 모든 분류작업을 맡는 곳이 15%(15곳)이었다.

3일 새벽 6시10분께부터 택배 분류 작업을 거부한 택배연대노조 소속 로젠택배 용인처인지점 택배노동자들. 채윤태 기자
3일 새벽 6시10분께부터 택배 분류 작업을 거부한 택배연대노조 소속 로젠택배 용인처인지점 택배노동자들. 채윤태 기자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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