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은 기존에 하던 업무를 좀더 분명히 한 것이라 말하지만, 국정원 직원이 사무실에 슬그머니 들어오는 것과 당당히 들어오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7일 한 고위 공직자는 국가정보원이 최근 보안업무규정 시행규칙을 고친 것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국정원이 지난달 28일 대통령훈령을 통해 공직자 신원조사 권한과 대상을 대폭 확대하자, 관가를 중심으로 국정원의
국내정보 수집이 편법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정원은 이번 규칙 개정으로 대통령실로부터 고위 공무원 인사와 관련한 신원조사 요청을 받으면, 광범위한 세평 정보를 수집한 뒤 이를 대통령실에게 보고하는 ‘통로’를 공식화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 3월 신설된 기존 규칙에선 국정원이 신원조사에 나설 수 있는 대상만을 정해뒀는데, 이번 개정 규칙에선
대통령이 임명하는 인사에 대한 신원조사를 대통령실에서 국정원에 요청할 수 있고, 국정원은 그 결과를 30일 내에 통보하도록 하는 조항을 새로 신설한 것이다.
법조계에선 대통령실이 국정원에 대한 신원조사 요청을 공식화한 점을 두고 과거처럼 정보기관을 이용해 공직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게 아니냐고 우려한다. 인사검증에 쓰이는 신원조사와 뒷조사·약점잡기 세평수집은 사실상 경계가 없는데다, 이를 최고정보기관인 국정원이 맡아 하면서 불법 사찰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문재인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법 개정을 통해 국내정보 수집을 폐지했다.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개정 규칙은 국정원을 공식적으로 통치에 이용해 정관계 인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고위직은 언제든 국정원 감시 대상이 될 수 있고, 그만큼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시행규칙 개정이 국내정보 수집을 제한한 개정 국정원법 취지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있다. 2020년 12월 전면 개정된 국정원법은 국정원의 권한남용과 정치적 일탈을 막기 위해 국내정보 수집 활동을 전면 차단했다. 같은 기간 개정된 보안업무규정(시행령)에선 신원조사 대상을 ‘국가기밀을 취급하는 사람’으로 한정하고, 국정원장이 직권으로 신원조사에 나설 수 있는 규정을 폐지하는 등 대상도 축소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법과 시행령보다 아래인 시행규칙 개정을 통해 되레 국정원 신원조사 대상을 확대한 것이다. 김남근 변호사(첨여연대 정책자문위원장)는 “국정원의 과도한 정보 수집과 정치 관여 등 문제가 커져 국내와 관련한 일체의 정보 수집을 못하도록 법을 개정했는데, 그 취지를 하위 법규 행정 입법을 통해 무너뜨리는 꼴”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국정원 직원이 고위 공직자 인사검증 목적이라며 동료관계, 업무처리, 성격 등 세평까지 수집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는 시행규칙 개정 이전에도 일부 관가에서 돌고 있었다. 현직 법조인은 “세평 수집은 보안업무 규정에 따른 신원조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과거 청와대가 국정원을 통해 공직사회를 장악하는 강력한 수단 중 하나였고, 국정원 역시 이를 통해 권력을 유지·확장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법무부로 이관한 인사검증 업무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며 공무원들이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했다. 지지율 저점 고착화로 공직사회 장악력이 떨어진 윤석열 정부가 다시 국정원에 기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강재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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