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의사가 검사와 금융감독원 직원 등을 사칭한 범죄조직에게 한 달간 속아 예금·보험·주식·가상자산·아파트담보대출 등 41억원을 마련해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한 사건이 발생해 서울경찰청이 수사 중이다. 단일 사건 기준 공식적인 역대 최대 보이스피싱 피해 규모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23일 경찰 설명을 종합하면, 사건은 스스로 서울의 한 지방검찰청 검사라고 소개하는 낯선 목소리의 전화에서 시작됐다. “ㄱ씨 되시죠?”라며 전화를 건 사람은 피해자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름과 어디서 일하는지를 알고 있는 ‘검사’의 강압적인 목소리에 위축된 ㄱ씨는 시키는 대로 ‘검사’를 카카오톡 친구로 추가했다. 카카오톡 프로필엔 검찰청 이미지가 있었고, 대화를 시작한 뒤 검사 공무원증을 보내왔다.
‘검사’는 ○○○이라는 보이스피싱 범인이 ㄱ씨의 계좌를 보이스피싱 자금세탁용으로 썼다고 했다. 이미 ㄱ씨 앞으로 들어온 고소장만 70여장이라며, 그 중 한건을 카카오톡으로 보내왔다. “ㄱ씨 자산이 정상자금인지 확인해야 하는데 협조하지 않으면 구속 수사하고, 협조 잘하면 카카오톡 약식조사로 갈음하겠습니다.”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말하는 약식조사는 카카오톡으로 진술하고 ㄱ씨의 계좌 확인에만 협조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카카오톡으로 위조한 구속영장과 공문을 보냈다. 실제 검찰 등 수사기관이 카카오톡 약식조사 및 구속영장을 보내는 경우는 절대 없다.
“협조하겠습니다.” 구속이 두려워 말했더니, ‘검사’가 보안프로그램이라며 카카오톡으로 링크를 보내자 악성앱이 설치됐다. 이때 이른바 ‘강수강발’(강제 수신 강제 발신) 기능도 함께 설치된 것으로 파악됐다. 강수강발은 경찰과 검찰, 금감원, 은행 등 어디로 전화를 걸어도 범죄조직이 받고, 범죄조직이 피해자에게 거는 전화가 이런 기관들의 정상 전화번호로 표시되는 기능이다. ‘검사’는 전화번호를 알려줄 테니 금감원 직원에게도 자금세탁 여부를 확인해 보라고 했다. 전화를 거니 금감원 직원을 사칭한 이가 ㄱ씨에게 “계좌가 자금세탁에 활용된 게 사실”이라고 했다.
이후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검찰수사관’ 역할을 한 조직원은 ㄱ씨에게 대출을 해서 실제 출금해야 명의가 범행에 연루됐는지 알 수 있다며 대출받은 돈을 전달하라고 했다. 범죄 연관성이 없으면 모든 돈을 돌려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예·적금, 보험 등을 모두 확인해야 한다며 해약을 요구하기도 했다.
ㄱ씨는 여러 은행 지점을 돌며 현금을 인출했다. 은행 창구 직원이 현금 사용 목적을 문의했지만, 범죄조직이 미리 알려준 대로 직원 월급으로 지급할 거라고 했다. 현금을 모두 인출한 뒤엔 금감원 직원이라고 사칭한 현금수거책을 만나 현금을 전달했다. ㄱ씨는 범죄조직에 돈을 계좌이체하고, 가상자산을 보내기도 했다.
ㄱ씨는 한달간 41억원의 피해를 본 뒤 뒤늦게 보이스피싱임을 깨닫고 경찰에 신고했다. 구속 등의 강압적인 목소리와 위조된 검사 신분증과 구속영장, ‘강수강발’ 등 몇가지 장치로 피해자를 완전히 속인 범죄조직은 “비밀 유지를 해야한다”며 입단속도 철저히 시켰다. 이에 피해자 ㄱ씨는 한달간 주변인에게 상담조차 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는 범죄조직원을 검사라고 믿으며, 완전히 심리적으로 지배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7월까지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1만4197건)와 피해 규모(3613억원)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30%, 28% 줄었지만 이런 ‘기관사칭형’ 사기 비중이 37%로 지난해(21%)보다 증가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은 “의사·연구원·보험회사 직원 등 직업과 학력 등과 무관하게 언제든 피해를 볼 수 있다”며 “수사기관은 영장이나 공문서를 절대 사회관계망서비스나 문자로 보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박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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