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는 ‘학벌이 곧 능력’이라는, 견고하지만 엇나간 ‘신화’가 있다. 사진은 출신학교 차별금지 법제화를 요구하는 시위 모습. 연합뉴스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몇주 전 트위터에서 “이 세상이 고등학교 때 공부 잘했던 사람들의 날로 먹기 대작전같이 느껴진다”는 글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이틀 만에 8천회 이상 공유되었고 수만명이 이 글에 대해 한마디씩 보태고 논쟁을 벌였다. 글 게시자는 결국 ‘노력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었다’며 사과하는 글을 올렸다. 그 뒤로는 사과할 필요가 있었냐를 두고 논쟁이 이어졌다.
문제의 글을 하나의 언표라고 한다면 저 하나의 언표에는 다수의 명제가 중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공부 잘했던 사람들’에는 공부에 재능이 있는 사람,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 수능 점수가 높은 사람, 명문대에 입학한 사람 등이 한꺼번에 호명되고 있다. 저 글을 읽은 사람들은 각자 어느 쪽에 자신을 이입하느냐에 따라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반응을 보인다. 또한 ‘날로 먹는다’에도 여러 명제가 중첩되어 있다. 사회의 부를 독점한다, 능력만큼의 보상을 받는다, 기여도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다, 기여한 것보다 더하게 돌려받는다 혹은 그래야 한다고 우긴다, 능력도 기여한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너무 많이 가져간다, 공부(시험성적)=능력이 아닌데도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이 많아야 한다고 우긴다, 능력=기여가 아닌데 많이 가져갈 자격이 자동적으로 주어진다고 우긴다 등의 명제가 구분 없이 뒤엉켜 있다. 마찬가지로 각자 어느 명제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매우 다양한 반응이 따른다.
능력주의 절대기준은 학벌?
한국의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는 그것을 지탱하는 견고한 신화가 있다. 학벌이 곧 능력이라는 신화다. 어쩌면 이 신화에 관련한 논쟁이 한국의 능력주의 논쟁에서 최소 8할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들리는 메시지일지라도 능력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학벌주의를 배제한 ‘올바른 능력주의’를 요구하는 메시지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위의 트위터 글도 그 안에 중첩된 명제들을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올바른 능력주의’를 요구하는 글이 될 수도 있고, 능력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글이 될 수도 있다. ‘날로 먹는다’를 ‘시험성적=능력이 아닌데 마땅히 가져갈 것이 많아야 한다고 우긴다’라고 해석하면 한국에서 능력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다시 제대로 정의해야 한다는 말이 되므로 ‘제대로 된 능력주의’를 주장하는 메시지가 된다. 그게 아니라 ‘날로 먹는다’를 ‘능력과 기여만큼 보상받는다’로 해석하고 ‘능력과 기여’라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는 글로 읽는다면 해당 글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재고찰을 유도하는 메시지가 된다. 요컨대 트위터 글을 쓴 사람을 포함해서, 그에 발끈하고 논쟁에 나선 사람들 모두 각자 다른 입장에서 다른 이해와 해석을 가지고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다.
5년 전쯤 페이스북 익명 페이지에 하나의 글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가 잠시 잊힌 뒤, 공교롭게도 대선 직후 다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학벌주의가 더 심해져서 스카이(SKY,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이 더 대접받았으면 좋겠어요. 아예 진출할 수 있는 직업군이 분류되면 더 좋고요.” 이 몽니를 능력주의라고 말하면 심하게 선해하는 것이다. 이전까지 학벌주의가 학벌로 능력을 입증할 수 있으므로 학벌이 좋은 사람이 쉽게 취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믿음이었다면, 이제는 학벌로 능력을 입증할 수 없는 사람이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믿음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글이다. 여기서는 더 이상 능력주의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문제의 트위터 글이 논란이 된 지 하루 뒤, 다른 한 사람이 다음의 글을 남겨서 더한 ‘어그로’를 끌었다. “고등학교 때 공부 잘하고 특정 시험 잘 준비한 친구들은 자기들이 잘사는 게 아니라, 시험공부 대신 다른 인생을 선택한 삶이 조져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위에서 인용한 학벌주의 강화를 주장한 글쓴이의 멘탈리티를 관통한다. 바로 ‘능력을 충분히 입증하지 못한 사람은 사회로부터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믿음’이다.
한 사람이 사회에 순응한다는 것은 지금 삶에 만족하며 산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족감 전에 안도감이 있다. ‘내가 저렇게까지 찌질하게 살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안도감이다. 지금 사회에 순응하며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찌질하게 사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거나 어떻게든 만들어내기라도 한다. 이러한 순응 기제는 한국의 고질적인 학벌주의와 결합하여 위의 페이스북 익명 글과 같은 언어도단을 낳기도 한다.
‘나랑 다른 쟤들 망가졌으면…’
여태껏 학벌주의의 명령을 들으며 성장한 사람들은 그렇게 사회가 시키는 대로, 하고 싶었던 것들 다 포기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는데 그에 상응하는 뚜렷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회의 악조건에 대응하는 두가지 방법은 변화를 요구하며 저항하거나 순응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상당수 청년들은 기이한 방식으로 저항과 순응을 결합한다. 자기들보다 못사는 사람을 보면서 위안 삼고, 위안 삼을 사람이 안 보일 때는 억지로라도 자기들보다 못사는 사람을 만들어내고 못사는 채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사회가 명령하는 대로 충실히 따랐지만 돌아오는 보상이 모자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고. 사회가 명령하는 대로 충실히 따르지 않고, 수능공부를 하는 대신 예체능으로 대학을 가거나,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취직을 하거나, 어쨌건 ‘정상적인 코스’를 밟지 않고 나름의 길을 개척한 사람들이 실패하기를 바란다. 위에서 트위터 이용자가 말한 대로 ‘시험공부 대신 다른 인생을 선택한 삶이 조져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가 여태껏 했던 노력에 준하는 노력을 (자신의 편협한 기준에서) 하지 않은 사람들의 인생이 조져지는 것이라도 봐야 자신이 쏟았던 노력이 부정당하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례가 있다. 직장인들이 자신의 회사 이름만 걸고 익명으로 글을 올리는 ‘블라인드’라는 소셜미디어 사이트가 있다. 여기에 대기업에 다닌다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썼다. “방탄소년단 집 산 거 보고 진짜 미칠 거 같다. 솔직히 얘네들은 하고 싶은 거 하다가 운 좋아서 빵 뜬 건데 노력은 내가 더 하지 않았냐? 얘네가 수능이라도 봤을까? (…) 난 하기 싫은 일 꾸역꾸역 하고 노력해도 집 하나 사기 힘든데 얘네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다가 운 좋아서 떴는데 진짜 화나고 미칠 거 같다.” 여기에 능력주의는 없다.
김내훈 _ 첫 책 <프로보커터>에 이어 <급진의 20대>를 썼고, <인싸를 죽여라>를 번역했다. 한국의 20대 현상과 좌파 포퓰리즘, 밈과 인터넷커뮤니케이션 같은 디지털 현상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