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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전 국민참여재판으로 해주세요” 성범죄 가해자가 요구했다, 왜?

등록 2022-06-29 16:24수정 2022-06-29 17:15

‘피해자다움’ 강요하는 성범죄 국민참여재판
‘서울대 교수 성추행’ 무죄 규탄 기자회견
2차 가해 등 피해자 무방비 노출
“배심원 교육 등 제도적 뒷받침 방안 마련해야”
성범죄. 성희롱. 게티이미지뱅크.
성범죄. 성희롱. 게티이미지뱅크.

“1심은 사건의 내용에 집중하기보다, 배심원들에게 ‘피해자를 의심해야 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다투는 괴상한 법정으로 전락했다. 그 속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상황을 모두 재연하면서도, 자신의 피해를 부정당하는 경험 속에 놓여야만 했다.”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A교수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학생‧시민사회 공동 대응(공동대응)’이 29일 진행한 기자회견문 중 일부다. 공동대응은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 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된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ㄱ교수(A교수) 사건 재판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됨으로써 2차 가해가 발생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국민참여재판 도입 이후 성범죄 사건의 경우 무죄율이 과도하게 높아지고, 일부에서는 형량을 낮추기 위해 이를 악용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며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9일 공동대응은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 법원 삼거리에서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전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A교수에 대한 1심 무죄 판결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참여재판의 민주주의적 가치와 긍정적인 취지에도 불구하고, 성폭력과 인권침해는 다수결 민주주의에 맡겨둘 수만은 없는 종류의 사건이다. 위계 관계에 대한 고려, 사회적 편견의 배제, 피해자 보호가 필요한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라며 “이번 재판에서 A교수가 물고 늘어진 ‘피해자다움’은 성폭력 사건의 실제와 사회적 인식의 간극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 재판은 처음부터 평등할 수 없는 재판이었다”라고 밝혔다. A교수는 지난 2015년과 2017년 ㄴ씨를 세 차례 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지난 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9부(재판장 김승정)는 A교수에게 배심원단의 의견과 같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의 구체적 내용이 일관되지 않고 번복되고 있는 점 등에 비춰볼 때 피해자 진술만으로는 범죄 혐의가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앞서 ㄴ씨는 국민참여재판의 진행을 반대했다. 검찰은 지난 14일 1심 판결에 대해 항소했다.

성범죄 사건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면서 발생하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등은 여성단체와 전문가들이 꾸준히 우려를 제기해 온 문제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성폭력 사건의 경우 지금까지 재판을 진행하면서 발생하는 피해자 신문 과정에서의 무관한 질문, 피해자에 대한 편견이 문제가 돼왔다. 이에 법원에서는 성폭력 전담재판부를 두는 등 여러 장치를 마련해 온 맥락이 있다. 그런데 국민참여재판의 경우 피고인이 성폭력 사안에 대해 (배심원들이 가지는) 대중적인 편견이나 통념, 피해자 비난 등에 편승하는 일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공동대응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A교수 쪽은 사건 그 자체와는 관련이 없는 피해자의 말 토씨 하나하나를 꼬투리 잡았고, 맥락 없이는 자칫 의미심장하게 읽힐 수 있는 조력자들의 대화 내용을 발췌하여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몰았다”고 했다.

성범죄 사건이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법조계에선 이를 악용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고 한다. ㄴ씨의 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변호사 업계에선 성범죄 사건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하는 것이 ‘상식’이 됐다”며 “실무적으로 볼 때 무죄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가해자의 의뢰를 받은)변호사들은 성범죄 사건을 맡으면 국민참여재판부터 검토한다”고 했다. 실제 송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법원에서 받아 공개한 자료를 보면, 지난 2010년부터 2020년까지 국민참여재판 접수 건수는 7293건인데, 이 중 성범죄 사건이 1720건으로 기타 유형을 제외하고 가장 많았다. 또한,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성범죄 사건의 무죄율은 지난 2010년 14%에서 2020년 48%로 꾸준히 증가했다.

29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 법원 삼거리에서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에이(A)교수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학생‧시민사회 공동 대응’이 기자회견을 벌이고 있다. 공동대응 제공
29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 법원 삼거리에서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에이(A)교수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학생‧시민사회 공동 대응’이 기자회견을 벌이고 있다. 공동대응 제공

전문가들은 이러한 문제가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하는 일부 배심원들의 잘못된 통념이 작용한 결과라고 보고 사전 교육과 충분한 준비기일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홍진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 2017년 발표한 논문에서 “배심원들에게 형성된 편견과 고정관념을 교정할 수 있는 기회와 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교정할 의지가 없는 배심원이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하는 것을 배제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고 적었다. 김 소장은 “국민참여재판을 열기 전에 준비기일을 충분히 갖고, 사건과 무관하게 과도하게 피해자에 대한 인격적인 공격을 하는 질문 등을 배제하는 방안들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고병찬 기자 ki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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