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들을 넘는 여자들> 기획한 ‘허와 들’ 인터뷰
피해 딛고 일상 회복한 9명의 햇살같은 이야기
피해 딛고 일상 회복한 9명의 햇살같은 이야기
<허들을 넘는 여자들> 책 표지. 기획자 허, 들 제공
미디어는 무심하게 성범죄 피해를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라고 표현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어요. 아주 힘든 일은 맞지만, 살다 보면 하루 열번 생각나던 것이 한 번 생각나고, 한 달에 한 번 생각나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17일 화상 인터뷰로 만난 ‘들’(활동명)은 느리지만 힘 있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20대 여성으로, 출판사 이야기모란단을 이끄는 그는 또래 여성인 ‘허’(활동명)와 함께 <허들을 넘는 여자들>이라는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성범죄 피해를 겪고도 사회 곳곳에서 “잘 살고” 있는 여성 피해자의 수기를 모아 책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다.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책 인쇄비 등을 모았는데, 마감일(19일)을 이틀 앞둔 시점에 목표 모금액의 482%를 달성할 정도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남성 후원자도 40%나 됐다. 건너 아는 사이였던 허와 들, 두 사람이 기획에 나선 건 지난해 ‘청주 여중생 사망 사건’을 목도하고 난 뒤다. 의붓아버지에게 지속해 성적 학대를 당한 ㄱ과, ㄱ의 집에 놀러 갔다가 성범죄 피해를 당한 ㄴ이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이 겪었을 괴로움, 절망감, 무력감이 떠올라 몸서리를 쳤다. 두 사람도 성범죄 피해를 겪은 적이 있다. “저도 그 시간을 통과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갔어요. 하지만 동시에 이런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들 곁에 ‘생각보다 괜찮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어’라고 말해줄 언니가 딱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기획자 ‘들’) 그날부터 ‘허’와 ‘들’은 그런 얘기를 전해줄 언니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출판사 인스타그램 등에 성범죄 피해를 겪었지만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의 글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올렸다. 7명을 모집하는데 그 서너배가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도중에 지극히 내밀한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하는 일에 부담을 느낀 일부 작가가 하차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멈추지 않고 온라인 공간을 뒤져 작가를 발굴했다. 그렇게 모인 7명의 수기에 ‘허’와 ‘들’의 이야기까지 보태 9편의 원고를 책에 담는다. 10대부터 40대, 변호사를 꿈꾸는 로스쿨 학생부터 미국에서 일하는 엔지니어까지 연령·직업·지역이 모두 다른 ‘언니’들은 긴 터널을 지나고 맞은, 햇살 같은 시간을 이야기한다. ‘앞으로의 10년이 기대가 돼. 주저앉아서 깨진 마음의 조각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울던 지난 시간과는 달리, 이제는 그 조각들을 챙겨서 삶의 다음 행보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 ‘네가 그토록 바라던 ‘보통의 삶’을 너도 모르는 사이에 살아내고 있을 거야.’ (‘카티’의 글 중) ‘성범죄 피해를 겪고도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한 작가들의 이야기에는 여느 기관의 성범죄 피해자 안내서에서 볼 수 없던 진짜 조언도 녹아있다. ‘이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면 좋을지에 관한 명확한 방향성을 갖는 것이 중요해’(‘카티’), ‘사람들이 말하는 피해자다움에 관한 이야기를 자꾸 듣다 보면 그 말 때문에 스스로를 의심하고 좀 먹게 될지도 몰라. 가장 소중한 건 너야. 스스로와 연대해야 해’(‘키위’) 책 뒷부분에는 △신고를 머뭇거리는 당신에게 △신고를 못 하는 당신에게 △신고를 안 하고 싶은 당신에게 등 처한 상황이나 마음 상태별로 촘촘한 매뉴얼을 만들어 실었다. ‘들’은 “우리나라 성범죄 신고율이 10% 수준인데도 기존의 매뉴얼 대다수는 신고를 전제로 만들어졌다”며 “신고를 못 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에게 이처럼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힘을 주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책에는 가해자를 신고하는 대신 ‘가해자 교육 이수, 피해자 지원단체 평생 기부’를 요구하고 공증까지 받은 사례도 나온다. “사건 가해자가 쓴 사과문을 읽어봤는데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어요. 어떤 핑계도 대지 않고 철저하게 뉘우치는 자세로 썼더라고요. 신고와 법적 처벌이 모두에게 최선의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요.”(‘들’)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이나 책에는 ‘가해자 매뉴얼’도 포함돼 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가해자 매뉴얼은 온통 형량 줄이는 방법뿐이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2차 피해를 주는 가해자도 흔하죠. 피해자를 위해서라도 가해자가 올바른 대응 방법을 알아야 해요.”(‘들’)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은 여전히 가볍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성범죄 피해자도 잘 살 수 있다’는 책의 메시지는 자칫 성범죄 가해를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오독’될 여지가 있다. ‘허’와 ‘들’도 이 지점을 깊게 고민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피해자 당사자의 말하기가 필요하다고 봐요. 피해자가 직접 처벌 강화를 말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재수 없는 특정인이 아니라 누구라도 성범죄 피해를 겪을 수 있을 만큼 성범죄가 만연한 사회라는 점, 그럼에도 피해자는 매일 슬프고 우울하지만은 않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린다면 처벌 강화에 대한 목소리도 결코 약해지지 않을 겁니다.” (‘허’)
<허들을 넘는 여자들> 에디터 ‘허’·‘들’이 제작한 스티커 굿즈
성범죄는 교통사고랑 많은 점에서 닮아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사고이며, 사고가 난 뒤에는 힘들고 아프죠.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거예요. 저희가 약속할게요. - ‘허’
성범죄 피해자들을 ‘상처’라는 좁은 프레임을 안에 가두지 마세요. 그 좁은 틀안에 갇혀 있기에 그분들은 너무 큰 사람입니다. - ‘들’최윤아 기자 ah@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