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17일 계엄군을 피해 이화여대 지하 보일러실에서 함께 숨어있었던 ‘남학생’을 찾은 이영목씨. 사진 정대하 기자
‘한 남자의 안부를 묻고, 찾습니다.’ 지난해 5월18일치 <한겨레> 8면엔 1980년 5월 대학에 들이닥친 공수부대를 피해 함께 숨어 있었던 남자를 찾는 광고가 실렸다. 익명으로 광고를 낸 이는 1980년 5월 16~17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전국 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했던 대학생이었다. 그는 5월17일 오후 5시30분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이 남성과 이화여대 한 건물 지하 보일러실에서 밤 11시30분까지 숨어 있다가 가까스로 도망쳤다. “둘은 60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난 아직도 그대의 이름, 출신 대학도 모르고, 심지어 얼굴조차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만 약 175~180㎝ 정도이고 마른 체형이었던 것만 떠오릅니다.”
이 광고는 잔잔한 화제가 됐지만, 정작 광고를 낸 이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광고를 낸 한의사 이영목(65)씨가 지난 13일 <한겨레>와 만나 ‘광고 이후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광고가 나갔던 날 밤, 41년 만에 그 남성과 연락이 닿았다.
2021년 5월18일치 <한겨레> 8면에 실린 광고.
도망자였던 두 사람은 똑같이 강제로 군대로 끌려갔다. 한양대 경제학과 재학 중이던 이씨는 1980년 9월4일 강제징집 당했다. 제대를 앞둔 1983년 1월 강릉 보안대로 끌려간 이씨는 24일 동안 ‘녹화공작’을 받은 뒤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했다. 이씨는 “직장에 잘 다니고 있던 친구 2~3명의 양해를 얻어 보고서를 작성했고, 대학 친구들 이야기는 거의 다 거짓으로 썼다”고 말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이씨와 같은 강제징집과 녹화·선도공작 피해자는 2417명이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600여명의 명단을 추가로 파악해 확인 중이다.
이씨는 “지난해 10월 국가기록원에 요청해 진술 기록 등을 봤는데, 보안사에서 치욕을 겪으면서도 차마 영혼까지 팔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고 말했다. 대학으로 복학한 그를 1984년 12월까지 사찰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2002년 한의대에 편입해 한의사가 된 그는 광주의 한 요양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이씨는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칠순 때 씻김굿을 하듯 내가 겪었던 일들을 정리해 자서전을 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6월18일 자신들을 숨겨줬던 이화여대 경비원 아저씨의 아들(60)도 찾아서 만났다. 그런데 경비원 아저씨가 국가유공자인데도 불가피한 사정으로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했다는 말을 아들로부터 전해듣고 안타까웠다. 그는 “국가보훈처에 안장 가능한 지 등을 문의해 고인의 위패를 지난해 9월 초 서울 현충원에 봉안했으며 훗날 부부 합장으로 현충원 안장이 가능하다는 설명도 들었다. 미안한 마음을 조금은 던 느낌”이라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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