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직전 북한 종교박해 피해 월남 원산 덕원신학교 시절 가장 그리워 담배 나눠필 정도로 학풍 자유로워
39세 젊은 나이에 바티칸서 주교 서품 “나이 어린 것이야 시간 가면 되는 것” 바오로6세 교황의 말씀 기억나
1980년 5·18, 두고두고 마음에 맺혀 있어 죄를 미워해도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야 용서가 ‘정의에 대한 요구’ 포기는 아니다
당시 광주대교구장 명의 사목서한 발표 인간 존엄성·민주주의에 대한 믿음 강조 “이 시련의 결말이 어떠할지 몰라도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승리 확신한다”
올해 백수(白壽)를 맞는 윤공희 대주교가 3일 오후 전남 나주시 광주가톨릭대학교 주교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나주/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박찬수 대기자
백(百)에서 일(一)을 뺀 나이 백수(白壽), 곧 우리 나이로 99세를 일컫는다. 윤공희 대주교가 올해 11월 백수를 맞는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직접 쓰진 않았지만 구술을 통해서 얼마 전에 <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란 책을 내신 걸 봤기 때문이다. 윤 대주교의 구술을 받아 글을 쓴 권은정 작가가 “매우 건강하시다. 대화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길래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선뜻 좋다는 응답을 주셨다. 지난 3일 전남 나주 광주가톨릭대학교 주교관으로 찾아가, 북한 교회와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해 1시간 남짓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 세기를 살아오신 윤 대주교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아픔을 고스란히 체현하고 있다. 1924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함경남도 원산의 덕원신학교를 다닌 윤 대주교는 한국전쟁 직전 북한 정권의 종교 박해를 간신히 피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로마 바티칸에서 주교 서품을 받고, 1980년 5월엔 광주대교구장으로 5·18민주화운동의 비극을 목격하고 마지막까지 계엄군의 유혈진압을 막으려 사력을 다했다. 곧 5·18민주화운동 42돌을 맞는다는 말에 윤 대주교는 “그래요. 두고두고 내 마음 속에 맺혀 있죠”라고 말했다. 만약 젊은 날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엔, 꽃다운 10대를 보낸 북한 덕원신학교 시절로 돌아가겠다고, 그 때가 가장 그립다고 했다.
― 오는 11월에 백수 (白壽 )를 맞으십니다. 여전히 정정하신데,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두 분이 다 장수하셨어요, 90세 이상 사셨으니까. 잘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요즘도 하루 40분씩은 열심히 걷고 있어요.”
―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십니까?
“단순하죠. 하루 종일 잠을 많이 자요. 미사를 드리고 아침식사를 하고 나면 자야 해요. 점심 먹고 또 한숨 자죠. 자고 기도하고 그거밖엔 없어요.(웃음) 아,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요. 나이 드니 귀는 어두워지는데 눈은 아직도 아주 밝거든요. 그래서 책을 많이 읽습니다.”
― 1950년에 사제 서품을 받으셨으니 햇수로 72년이고, 한국 천주교 역사상 사제 서품(수품) 70주년을 맞은 두 번째 사제라고 들었습니다. 언제부터 사제의 꿈을 키우셨습니까?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그런 질문을 가끔 받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계기가 없어요. 우리 부모님이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셨고, 아버지는 본당 회장직을 맡으셨으니까 저도 성당을 열심히 다녔고 어린 나이에 복사를 맡았습니다. 큰 형님이 신학교 갔다가 신부가 되지 않고 나왔거든요, 그거 보면서 신부가 참 좋아보이고 나도 신부가 돼야겠다 생각했던 거 같아요. 아주 단순하고 싱거워요.”(웃음)
윤공희 대주교가 지난 3일 <한겨레>와 인터뷰하는 모습. 나주/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이번에 펴내신 <북한 교회 이야기> 중 해방 직후 덕원신학교 재학 시절 월반하라는 권유를 듣지 않은 게 대주교님 목숨을 살렸다는 대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때 상황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공부를 꽤 잘했는데, 1등이 김남수 주교(나중에 수원대교구장을 지냄)고 2등이 나였는데, 교장 선생님이 나한테 월반을 원하면 해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뭐 월반까지 할 필요 있겠나 싶어 거절했는데, 그때 월반해서 1948년에 사제품을 받았다면 49년에 본격화한 북한정권의 교회 박해 때 다른 신부님들과 함께 납치돼 아마 시복(諡福·순교한 이에게 복자 칭호를 내리는 일) 조사대상자 명단에 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생각하게된 첫 번째 순간이었죠.”
― 또하나 덕원신학교에서 주일엔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담배를 나눠줬다는 일화가 눈에 띕니다. 굉장히 자율적인 학풍이었던 거 같은데, 이것이 대주교님에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그때 남쪽의 신학교는 담배를 허락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주일날 점심식사 후에 학생들에게 담배를 허용했어요. 학생들이 담배가 없으니 교장 선생님한테서 대표가 담배를 받아와서 한시간 동안 담배를 피우곤 했어요. 그걸 ‘타바카리우스(타바코 담당)’라고 했어요. 남쪽보다 아주 자율적이었지요. 남쪽 신학교엔 ‘실내 침묵’이라고 실내에선 말을 해선 안된다는 규칙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런 학풍이 저한테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요. 합리적이라고 해야 할까, 학교에서 학생들 얘기를 잘 들어줬으니까 그게 내 인생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얘기에 귀 기울이게 하는 그런 영향을 끼쳤다고 봐요.”
― 1963년 10월20일 바티칸에서 주교 서품 받으실 때 나이가 39세였습니다. 교황으로부터 직접 주교 서품을 받는 의식은 어땠습니까?
“그때 로마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주교 서품식을 했습니다. 주교 서품을 같이 받은 13명과 함께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교황님을 알현했어요. 바오로6세 교황께서 젊은 사제인 나를 보시더니 나이가 몇인지 물으셨어요. 옆에서 보좌하던 포교성 장관이 39살이라고 대답하니까, 교황님이 ‘나이가 어린 것이야 시간이 가면 되는 것이니까’라고 그러시더라구요.”
― 곧 5·18민주화운동 42돌입니다. 대주교님에겐 굉장히 뜻깊은 시간일 텐데요, 1980년 5월의 광주가 대주교님에게는 어떤 의미로 남아 있습니까?
“이제 그 날이 또 다가오는데, 민족적으로 참 특별한 시련이었죠. 군인은 국민에게 봉사할 책임이 있죠.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국가는 정당한 방법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고, 집권자와 군인은 국민에게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죠. 어떤 야심을 갖고, 자기는 야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폭력으로 권력을 잡는다는 건 부당한 일인 거죠. 그러면 국민의 저항을 받기 마련이죠.”
윤공희 대주교가 3일 박찬수 <한겨레> 대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나주/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당시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으로 사태를 직접 겪으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또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1980년 5월17일에 계엄령이 확대되고 18일에 소식이 들어오는데 (광주시내) 사방에서 군인들이 막 (시민을) 폭행하고 벌써 사람이 죽었다는 말도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학동에 있는 까리따스 수녀원 주교관에 살았는데 거기서 출퇴근을 했어요. 그날(19일) 아침에 도청 앞을 지나서 가는데 도청 앞에 사람들이 좀 남아 있었어요. 그때 교구청 사무실이 금남로의 가톨릭센터 6층이었는데, 센터에 올라가서 보니까 차차 사람들이 모여드는 게 보였어요. 그리고 센터 모퉁이에서 내려다보니까 금남로에 공수부대가 있는데 어떤 젊은이가, 학생은 아니고 신사복을 입었더라구요, 목에 피를 막 흘리더라구요. 이 젊은이가 맞은편 건물로 가다가 털썩 주저앉는 거에요. 저 사람 응급치료가 필요하겠다 생각을 하면서도, 나도 내려가면 (군인들이) 봐주지 않을텐데, 나이 들었다고 봐주지 않을텐데, 그래서 겁이 나서 내려갈 수가 없는 거에요. 성경에 보면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나와요. 유대인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당해 쓰러졌는데 사제가 그걸 보고선 옆으로 피해가더란 거에요. 그런데 유대인과 원수지간인 사마리아인이 그 유대인을 데려가 치료해줬다는 우화인데, 아 내가 바로 그 사제로구나, 그런 가책을 받았어요. 그게 두고두고 내 마음 속에 맺혀 있죠.”
신군부의 광주 유혈진압 작전을 눈 앞에 둔 1980년 5월24일, 윤공희 대주교는 광주대교구장 명의로 교구청 산하 모든 교회에 사목서한을 보냈고 이 서한은 신자들 앞에서 낭독됐다. 서한 내용은 이랬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승천으로 천국의 문이 열리고 이제 새로운 하늘과 땅을 이룩해 주실 성령의 내림을 경축하여야 할 이 거룩한 주간에 우리 광주시민들은 역사에 없는 처참한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그 기본권이 존중되고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민주질서의 확립과 발전이 기약되고 있다는 이 시점에서 우리 광주시민들이 남다르게 바쳐야 했던 이 제물은 결코 뜻없는 희생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이 시련의 진전과 결말이 어떠할런지 우리들의 우려와 근심이 끝나지 않고 있지만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승리’라는 크리스챤 복음의 원리는 여기에서 분명히 구현되고야 말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1980년 5월24일 성신강림 전날,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대주교 윤공희』
― 사목서한을 읽어보면, 인간 존엄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대주교님의 믿음이 절절히 다가옵니다. 그때 어떤 심정으로 사목서한을 발표하신 겁니까?
“교회 책임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생각했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전화를 돌려서 뭐 물어볼 수도 없고, 방법이 없더라구요. 그래도 신자들에게 모이라고 해서 뭔가 얘기를 해줘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교구청 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사목서한을 준비하도록 해서 내보냈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른 게 없었어요, 오늘 어떤 마음으로 이 고난을 이겨내야겠는가 그런 걸 얘기하려고 했죠.”
― 기록을 보면 1980년 5월19일 대주교님은 직접 서울에 올라가 김수환 추기경님을 만나 광주 상황을 전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때 김 추기경님과 어떤 얘기를 나눴습니까?
“내가 5월20일에 서울에서 미사가 있어서 올라가게 되어 있었어요. 김 추기경님은 광주 소식을 몰래 듣고 계셨어요. 광주에 미국문화원이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문화원장이 미국인 신부를 통해 연락해서, ‘광주의 미국시민들을 서울로 소개시키기 위해 송정리에 미군 비행기가 오니까 미국 신부님도 송정리로 나오면 타실 수 있다’는 거에요. 나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미국문화원장을 통하면 서울의 김수환 추기경님에게 광주 소식을 보낼 수 있겠구나, 그래서 부탁했어요. 그 문화원장이 주한 미국대사에게도 그 소식을 전해도 되겠느냐고 해서, 아 그러면 좋겠다고 했지요. 그날(5월19일) 서울로 올라가서 저녁에 김 추기경님을 만났어요. 추기경 비서신부도 같이 있었고요. 내 얘기를 듣더니 비서신부가 ‘사람이 죽었느냐’고 묻길래, ‘내가 (가톨릭센터) 건물 아래서 피 흘리는 사람을 봤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나는 믿겠다’고 대답한 게 기억나요. 추기경님은 그때(광주가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고립돼 있을 때)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광주대교구와) 연락 좀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해서 허락받고 군종신부를 보냈어요. 군종신부가 추기경님 편지와 돈을 조금 갖고 왔다고 해서 내가 조비오 신부와 오병문 전남대 교수를 보내서 (광주 외곽의 계엄군 차단선에서) 편지를 받아오게 한 적이 있어요.”
― 계엄군의 광주 진압작전 전날인 5월26일 대주교님은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소준열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평화적 사태 해결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때 어떤 얘기를 하셨습니까?
“그때 계엄군이 다 쫒겨나고 시민들이 광주 시내에 있을 때인데, (계엄군과) 통할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전화는 통했어요. 소준열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태를 빨리 수습해야 할텐데 수습하려면 (군이) 시민들에게 폭력으로 잘못을 했다는 걸 시인하고 그걸 전제로 해서 수습해야 한다, 군이 다시 들어와선 안되고 경찰이 수습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소 장군도 군인들이 처음에 좀 심하게 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좋겠다고 소 장군에게 부탁했어요. 그때 얘기가 잘돼서 경찰이 들어왔으면….”
― 벌써 42년이 흘렀습니다. 광주의 아픔과 정신을 어떻게 승화해 나가야 할까요?
“권력은 민주주의적 정신을 갖고 국민에 대한 봉사를 하는 것인데, 그런 권위를 행사할 때는 항상 정의와 사랑을 갖고서 해야 한다,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 권력은 정의에 대한 봉사다, 이걸 우리 모두가 느껴야 합니다. 또 사람들 마음 속엔 그런 폭력을 사용한 사람에 대한 미움이 있죠. 그런 미움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어야죠. 죄인과 죄를 구별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죄를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해선 안된다, 복수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거죠.”
윤공희 대주교가 3일 인터뷰를 하던 중 환하게 웃고 있다. 나주/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정치·사회적으로 분열과 대립, 갈등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종교에서 강조하는 ‘화해와 용서’란 어떤 의미일까요?
“평화롭게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누구한테 해를 입은 사람이 있으면 용서할 수 있어야죠, 그러면 평화를 이룰 수가 있는 거죠. 용서를 하려면 사람과 사람의 죄를 더 분별해서 생각할 수가 있어야죠. 그러나 용서한다고 해서 정의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정의에 대한 요구는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고 용서가 정의에 대한 요구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교황님 말씀이에요. 요한바오로 2세의 말씀이에요.”
― 요즘은 누구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십니까?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가끔 나라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톨릭 신자여서 가끔 기도할 때 생각이 나곤 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학교다닐 때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죠.”
― 북한 천주교 소식은 좀 들으십니까?
“못 들어요. 평양에도 천주교회가 있어요. 그런데 소식은 들려오는 게 없어요.”
― 대주교님은 젊은 시절 북한에서 종교 박해로 큰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통일을 위해서 애써오셨는데요, 통일에 대한 대주교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북한에 대한 원한, 이런 거는 극복을 해야죠. 특별히 (북한에서) 고통받은 사람들이 먼저 그렇게 해야죠. 공산주의자의 잘못된 이론 때문에 그런 거니까, 그런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합하는 마음을 가져야죠. 이북의 현실을 잘 알 수 있으면 좋겠고, 그들이 잘못된 이념을 깨우칠 수 있기를 바래요. 요즘 통일에 대한 열망이 줄어드는 건 걱정이에요. 우리는 한민족이고 억지로 갈라진 상태인데, 이걸 잊지 말아야죠. (통일 열망이 줄어드는 것이) 이해는 되지만, 걱정도 돼요. 통일은 꼭 이뤄져야 합니다. 살아서 흩어진 사람 뿐 아니라 역사를 봐도 그렇고, 우리는 같은 말을 쓰는 한민족 아니겠어요?”
― 지금은 남북관계가 얼어붙었지만 전에 교류·협력이 좀 활발했던 시기엔 대주교님도 북녘 고향을 방문하실 기회가 있었을 듯 싶은데요.
“1985년 첫 번째 이산가족 상봉 때 중앙정보부(안기부)에서 사람이 왔어요. 저와 고향(평안남도)이 같은 지학순 주교가 신청을 했으니 주교님도 원하면 가실 수가 있다, 어떻게 하시겠느냐, 그런데 북한 천주교회가 압박을 받고 있는데, (내 가족들이) 아마 드러내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텐데, 내가 가면 그런 게 다 드러나지 않을까 걱정돼서 이번엔 안가겠다 다음에 가겠다, 그렇게 거절을 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안됐죠. 나중에 후회가 좀 들기도 했죠.”
대기자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