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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후배에게 냉혹, 윗사람에겐 저자세…어릴 적 ‘가스라이팅’ 탓?

등록 2022-05-07 09:07수정 2022-05-07 09:25

[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ㅣ정신적 학대
차량부품회사 일하는 동철씨 전형적 ‘강약약강’ 대인관계
어릴 적 부친에게 ‘가스라이팅’…가정폭력 등 기억 벗어야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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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철씨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동철씨는 상사에게 지나치게 순종적이고 잘 보이려고 합니다. 윗사람에게 90도로 인사하고, 하지 않아도 될 심부름까지 합니다. 주위 동료들은 동철씨가 상사들에게 잘 보여 빨리 승진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해 동철씨를 무척 싫어합니다. 그런데 사실 동철씨는 자기 스스로 윗사람에게 숙이고 들어가지 않으면 무척 불편합니다. 동료들과는 거의 어울리지 않으며 일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회사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고 관공서에 있는 공무원이나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에게도 비슷하게 숙이고 들어갑니다.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고 앞에 있는 사람을 높여 상대방에게 오버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됩니다.

“상무님께서 좋아하게 잘해봅시다”

이와는 정반대로 자신의 아래 직급 직원들에게는 무척 차갑고 화를 자주 내는 편입니다. 표정도 윗사람을 만날 때와는 달리 날카롭게 변합니다. “이것밖에 준비가 안 되나요?” “앞으로 더 잘하실 수 있지요?” “상무님께서 좋아하시도록 잘 준비해 봅시다.” 직원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몸서리치게 됩니다. 식당에 가서는 음식을 빨리 달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종업원에게 반말을 하는 경우도 흔하게 있었습니다. 자신보다 위에 있는지 아래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완전히 다른 행동을 보입니다.

그러다 결국 문제가 터졌습니다. 동철씨가 한 일이 잘못되어 바이어와의 중요한 계약이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동철씨는 상무실로 불려가 호통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때 동철씨는 자신의 아래 직원이 실수를 해서 이런 문제가 생겼고 알아듣게 이야기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동철씨는 상무실을 나오자마자 그 직원을 불러내 여러 사람 앞에서 야단을 쳤습니다. “어떻게 일을 이따위로 하는 거야. 내가 상무님께 얼마나 혼난 줄 알아?” 그런데 다른 직원들이 모두 나서서 동철씨에게 자신들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일이 잘 안되니 자기들 탓으로 돌린다고 부당함을 지적했습니다. “과장님 때문에 다들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제발 이 회사에서 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바람입니다.”

동철씨는 모두가 자신을 왕따시킨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분위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 직장 동료들은 동철씨에게 말도 걸지 않고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윗사람들도 동철씨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너무나 열심히 회사와 윗사람들을 위해 일했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설움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동철씨는 심각하게 우울해지면서 회사에 다닐 힘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다 가족의 추천으로 인근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했습니다. 동철씨가 보이는 ‘윗사람에게 지나치게 순종적이고 잘 보이려고 하는 특징’은 진료 중에도 두드러졌습니다. 담당 의사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하면서 자신은 이제 살아갈 의욕이 없다고 했습니다. 울면서 매달리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동철씨는 학교 다닐 때도 선생님께 그렇게 잘 보이려고 했다고 합니다.

동철씨는 결국 자신의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동철씨의 아버지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주위 사람들에게 잘하는 호인이었지만 가정에서는 폭군이었습니다. 술을 먹지 않은 맨정신으로도 동철씨와 동생을 자주 때렸고 동철씨의 어머니에게도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심지어는 재떨이를 집어던져 어머니가 머리를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동철씨가 아버지에게 맞고 어머니에게 가면 어머니는 동철씨에게 아버지 말씀을 잘 들어야 맞지 않는다며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항상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외도를 해서 밖에서 만나던 여자를 집으로 데려오기도 했는데 그러면 심지어 어머니가 식사를 대접해주기도 했습니다. 이제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셔서, 왜 어머니가 아버지의 폭력과 외도에 고생하면서도 자신에게 그렇게 아버지에게 순종하라고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담당 의사는 “가스라이팅”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스라이팅은 1938년 패트릭 해밀턴 작가가 연출한 스릴러 연극 〈가스등>(Gas Light)에서 유래한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 용어입니다. 가스라이팅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어머니와 동철씨는 아버지의 반복적 폭력을 통해서 자존감이 무너지고 심리적인 지배를 당하는 상태였습니다. 학대 가해자는 가스라이팅을 통해서 자존감을 앗아가고 그 사람이 자신을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는 두려움으로 순종하게 만듭니다.

어릴 적 가정폭력이 남긴 상처

동철씨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랐고 폭력이 잘못된 것이라고 배우기보다는 아버지와 같은 권위적인 존재의 도움이 없이는 자신은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윗사람에게 지나치게 잘 보이려고 하는 특징이 생겼습니다. 윗사람이 자신을 싫어하면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서 느꼈던 분노와 공포의 감정이 되살아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반대로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없으면 모든 일이 되지 않을 거라고 간섭하며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마침내 직장에서 윗사람에게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모든 설움이 복받쳐 올라오면서 상사에 대한 분노가 발생했고 우울증으로 이어졌습니다.

가정폭력은 트라우마의 근원이고 정신건강과 대인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반복된 폭력을 경험하면 분노가 쌓이게 되고 결국 자신에 대한 공격성을 유발해서 죽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가정폭력의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폭력의 문제에 초기부터 단호하게 대처하고 가족들에게 알려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도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영향을 주고 있다면 스스로 윗사람에게 과도하게 잘 보이려는 태도를 줄이고 자신이 하는 일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랫사람이나 가족들에게는 의견을 존중하고 지나치게 통제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성균관의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썼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이 글로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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