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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장에 이상 없는데도…아빠의 잦은 설사엔 이유가 있었다

등록 2022-04-09 09:29수정 2022-04-09 09:46

[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걱정·불안 동반 주요우울증

긴장과 불안이 일상인 태영씨
장 이상 없는데 설사 계속돼
만성 우울이 ‘장-뇌 축’ 악영향
태도 바꾸자 심신 모두 좋아져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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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씨는 방송국에서 기술직으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잘 지켜야 하는 직업의 특성상 항상 긴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루는 무척 중요한 생방송 촬영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촬영 시작 5분 전에 태영씨는 참을 수 없이 배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화장실에 가야 할 것 같은데 마침 그날은 자신을 대신해 스튜디오에서 일할 수 있는 인력이 없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중간에 급하게 부탁을 하고 나오다가 그만 방송 송출에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큰 문제는 아니어서 별일 없이 넘어갔지만 그 이후로 태영씨는 다시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억압된 감정이 신체에 악영향

그 뒤로 태영씨는 중요한 촬영이 있는 날이면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미리 화장실을 가야 하는 버릇도 생겼습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설사가 나오는데 여러 번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해야 겨우 멈추었습니다. 처음에는 동료들도 태영씨를 도와주었지만, 촬영 직전에 급하게 화장실을 가야 하는 일이 자주 생기자 동료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태영씨는 이전보다 회사에서 긴장이 높아져 집에 도착하면 완전히 녹초가 되었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아내와 자녀들에게 자주 짜증을 냈습니다. 결국 태영씨는 아내와 크게 다툰 뒤 이혼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태영씨는 설사를 치료하려고 회사 근처 내과를 방문해서 진찰을 받고 대장 내시경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장에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자 태영씨는 더욱더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대장암이나 췌장암이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결국 대학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받고 내시경을 진행했습니다. 그곳에서 태영씨는 담당 의사에게 심리적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들었고, 같은 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진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태영씨는 담당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설사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의사 선생님이 이 증상을 해결해주기만을 원했습니다. 촬영 직전에 장에서 신호가 오면 너무나 고통스러워 회사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고 합니다. 화장실을 뛰어가는 태영씨를 보고 직원들이 뒤에서 웃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태영씨의 아내는 병원에도 같이 오지 않을 정도로 태영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녀들은 태영씨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태영씨는 심리상담 중에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가 이 고생을 하면서 평생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돈을 벌어왔는데 가족 모두가 자신을 외면하고 있다며 설움에 복받쳐 울기 시작했습니다. 담당 의사가 태영씨에게 이렇게 울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태영씨는 남 앞에서 울어본 게 처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운 적은 있었지만 그때도 혼자 있었고 이전에는 한번도 타인 앞에서 운 적이 없었습니다. 검사 결과 태영씨는 ‘걱정과 불안이 동반된 주요우울증’으로 진단되었습니다.

만성적인 긴장과 우울은 장의 움직임에 문제를 일으킬 뿐 아니라 장에 살고 있는 정상 세균의 분포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우리 몸이 긴장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만성적으로 분비하게 되면 면역계를 교란해 병적인 세균이 장에 많아지고 이로 인해 만성 설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장과 뇌는 신호를 전달하면서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데 이를 ‘장-뇌 축’이라고 합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은 간헐적인 복통, 변비, 설사를 동반하는 증후군으로 만성적인 긴장과 우울을 가진 사람들에게 흔히 발생합니다.

태영씨는 어릴 때부터 항상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고 과묵한 편이었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바쁘셨고 따뜻한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남동생 또한 태영씨처럼 말이 없는 편입니다. 같은 집에서 지내지만 가족 간에 대화가 없고 웃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집에서 항상 부모님의 눈치를 보면서 긴장 속에 지냈고 서로 감정을 표현하고 이해하는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태영씨는 담당 의사에게 나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내도 아이들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태영씨의 마음속에만 있었습니다. 집에 오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식사하고 자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은 아버지는 정을 모르는 사람이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면 화를 내는 ‘앵그리버드’ 같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담당 의사는 태영씨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본 적이 없는데 진료 중에 왜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는지 분석해보았습니다. 태영씨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는 것을 처음 경험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님도, 아내와 자녀도, 직장 동료도 아무도 태영씨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태영씨는 자신이 가족들에게 어떠한 아버지였는지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태영씨가 화를 내는 감정밖에는 표현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고 서로 공감하는 것은 대인관계의 기본을 형성합니다. 가족들도 함께 산다고 감정적인 교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솔직한 내 감정 드러내기

‘너를 사랑한다’, ‘네가 자랑스럽다’, ‘오늘 기분이 좋다’, ‘고맙다’, ‘내가 도와줄 것 없을까?’, ‘오늘따라 너무 멋있어 보인다’ 등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고 이에 맞는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영씨는 부모님한테서도 학교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방법을 배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입니다. 태영씨는 조금씩 자신을 변화시키고 좋은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해보기로 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과의 관계도 점차 나아지면서 집에 가면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태영씨는 가족들에게 좋은 기분을 표현하고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직장에 가서도 동료들에게 편안한 미소로 대하고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위 동료들도 태영씨를 더욱 이해하고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태영씨의 설사 증상도 어느새 멈추었습니다. 서로 공감할 수 있는 행복한 가정과 직장으로 점차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성균관의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썼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이 글로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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