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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씨는 50대 여성으로 혀가 심하게 아픈 증상 탓에 5년째 고생 중입니다. 이비인후과에서 진찰을 받아도 혀에는 이상이 없다고 하고 뇌 영상 촬영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명하다는 병원마다 찾아가 진찰을 받았지만 영주씨에게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는 못했고 ‘신경성’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영주씨는 혀가 아픈 것 때문에 말하기 불편해서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집에서만 지냅니다. 남편인 민성씨도 영주씨가 계속 혀를 심하게 아파하고 다른 사람들을 피하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빈 식탁에 아들 밥상 차리던 엄마
부부는 5년 전에 말하기도 힘든 커다란 트라우마를 경험했습니다. 대학생인 큰아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아들은 착하고 별다른 문제 없는 모범생이었고 대학교 입학 후에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습니다. 그런데 2학년 봄부터 학교를 휴학하겠다고 하더니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신의 방에서만 지냈습니다. 아들의 방에 몰래 들어가보면 알 수 없는 내용의 메모지가 벽에 가득 붙어 있었고 혼자서 술을 마신 흔적이 있었습니다. 이전의 모범생 아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영주씨는 더 이상 아들이 그러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어서 당장 방을 깨끗하게 치우라고 야단을 치고 술병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결국 아들에게 사고가 난 것입니다.
영주씨는 아들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아침마다 큰아들 방에 들어가서 아침 먹으라고 부르고 마치 아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의 식사 시간에 큰아들 밥을 계속 준비했습니다. 민성씨와 둘째 아들도 처음에는 함께 슬퍼하며 영주씨를 이해하려고 했지만 한달이 지나도 이러한 행동이 계속되자 결국 소리를 지르며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영주씨에게 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이렇게 죽게 된 것은 심하게 야단을 쳐서 그런 거야, 엄마 책임이야.” 이 이야기를 듣고 영주씨는 마치 정신이 나가는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부터 자신의 혀가 이상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통증이 지속되었습니다.
영주씨는 이비인후과 담당 선생님의 권유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검사 결과 영주씨는 ‘정신병적 증상을 동반한 심한 우울증’과 ‘신체화장애’, ‘감정표현불능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진단되었습니다. ‘정신병적 증상을 동반한 심한 우울증’은 환청이나 망상을 동반한 우울증으로 증상이 심해질 때 자신만의 우울한 망상과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러한 우울증은 갑작스러운 위험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신체화장애’는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신체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영주씨는 자신의 정신적 트라우마가 신체적 통증으로 전환되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느끼는 정신적 고통이 무의식적으로 줄어드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감정표현불능증’은 심한 정신적인 트라우마 때문에 감정을 느끼거나 표현하려는 의지가 무의식적으로 제한되거나, 어린 시절부터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는 경우에 생깁니다. 영주씨는 항상 자신의 ‘혀’의 통증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사건이 있었던 그날 아들에게 야단을 친 자신의 혀에 죄책감을 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담당 의사와 영주씨, 민성씨는 함께 아들이 왜 사망했는지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극단적 선택의 사망 원인을 후향적으로 밝히는 것을 ‘심리부검’이라고 합니다. 아들은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이전과는 다른 행동을 보였습니다. 감정기복이 심해지고 술을 많이 마셨고, 이상한 메모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주씨에게 메모의 내용을 가져와보도록 했습니다. 메모를 분석해보니 어떤 뜻 모를 단어를 반복해 쓰기도 하였고, 죽음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이상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당시 죽음과 관련된 내용에 몰입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고 정상적이지 않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이것은 자살 위험에 중요한 ‘경고 신호’가 됩니다.
일조량 증가하는 봄, 감정기복 심해
영주씨가 그날 방을 치우라고 아들에게 소리를 친 것은 실제로 사고를 유발한 원인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생겼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1학년 2학기 때부터 성적이 떨어지면서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했고 친구들과도 제대로 어울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친구들도 아들이 무엇인가 다른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하는데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자신이 친구들로부터 고통받고 있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미 정신적인 문제가 1학년 때부터 발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민성씨는 담당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아들의 사망의 원인으로 영주씨를 원망한 것에 대해 후회하며 영주씨에게 사과했습니다. 부부는 서로 이야기하기 힘들었던 오랜 트라우마를 나누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편과 둘째 아들이 영주씨를 도와주고 이해해주면서 영주씨의 혀 통증도 이전보다 완화되었습니다. 이제는 가족이 함께 유가족들 자조모임에도 나가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은 2020년에 1만3195명으로,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비율로는 2019년보다 4.4% 감소했습니다.
정부가 자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2018년 국가행동계획을 수립하여 관리하면서부터 나타난 변화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3~5월 봄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수가 겨울보다 매달 200명 이상 증가합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일조량 증가로 인한 감정기복의 심화도 중요한 원인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집 밖으로 나가서 걷고 활동하면서 일조량 증가에 적응하는 것이 감정기복 발생 예방에 도움이 됩니다.
정부에서는 자살예방 정책을 전문적으로 전담하기 위해 작년에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을 출범시켰습니다. 영주씨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자살유가족들을 돕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필요한 경우 심리부검 면담과 유가족들에 대한 치료비 지원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변에 누군가가 자살로 사망했을 경우 대처를 돕는 사후대응 서비스도 점차 강화되고 있습니다. 정부와 민간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대한민국의 자살률이 0%가 되는 순간을 기대해봅니다.
전홍진 | 성균관의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썼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이 글로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