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통공사 ‘사회적 약자와의 여론전 맞서기’ 문건 갈무리.
서울교통공사가 ‘지하철 출근길 시위’를 이어온 장애인단체에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대응 문건을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공사는 ‘직원 개인이 만든 것으로 공식입장이 아니다”고 밝혔지만 해당 문건에는 장애인·노숙자·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맞서 싸워야할 상대’로 인식하고, 시민 불편을 여론전의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내용이 다수 담겼다.
17일 <한겨레>가 확보한 공사 홍보실 언론팀 직원(대리) 명의로 작성된 ‘사회적 약자와의 여론전 맞서기’라는 피피티(PPT) 문건을 보면 첫 장부터 “공사는 실질적 약자, 실점방지&디테일 발굴 중요…여론전 승부는 디테일이 가른다”며 자신들을 약자로 규정하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과 여론전을 벌여야 한다는 취지의 의견이 제시돼 있다. 문건 표지에 ‘2022.3 제작’이라고 적혀 있어 최근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상대방도 실점은 언제든 할 수 있다! 꼼꼼히 Catch(캐치)” , “현재는 출근길 시위 잠시 휴전 상태지만 디테일한 약점은 계속 찾아야”등의 표현에서 드러나듯 해당 문건은 전장연의 ‘실점’을 찾아 여론 지형에서 공사가 우위에 서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문건은 사회적 약자와의 여론전 기본 구도에 대해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숙인들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의 대사회 투쟁’으로 바라본다.
구체적인 대응 방안 예시로 “(휠체어) 바퀴를 열차와 승강장 틈 사이로 끼워 넣기+휠체어로 문 가로막기 사진 확보 후 자연스럽게 알리면 고의적 열차 운행 방해 증빙하는 것이 됨”이라고 제시했다. 공사의 교통약자서비스마저 ‘언론플레이’ 소재로 활용해야 한다는 표현도 있다. 문건은 “교통약자 위한 서비스는 (실효성이 있든 없든) 언플용으로 좋은 소재”라면서 “수어전용전화기, 또타앱 교통약자편의기능, 장애인이동권 기금 기부 등은 (공사가) ‘이동권 보장 소홀’이라는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제시했다.
서울교통공사 ‘사회적 약자와의 여론전 맞서기’ 문건 갈무리.
그러면서 전장연과 장애인 이동권 문제와 시위를 보도하는 언론도 ‘한 묶음’으로 싸워야 할 상대로 규정했다.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비마이너> 등의 기사를 갈무리한 문건은 “여론전도 기본적으로 불리! ‘약자는 선하다’ 기조의 기성언론+‘장애인 전용 언론’조합과 싸워야 함’이라고 주장했다.
문건은 공사가 장애인단체와 시민들을 ‘갈라치기’하고, 시민 불편을 여론전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한 정황도 담겨있다. 지난달 9일 한 시민이 ‘지하철 출근길 시위’를 진행 중인 장애인단체 회원을 향해 “할머니 임종 봐야 하는데, 시위 때문에 못 간다”고 항의한 것에 대해 회원이 “버스 타고 가세요”(이후 시민에게 “그런 걸 당해봤기 때문에 잘 압니다. 저도 그래서 임종을 못 봤거든요.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라고 말한 것을 두고 문건은 “(전장연의) 결정적 미스”라며 “여론전을 위한 보도자료 준비 중 고객 안전 지원 센터에 도움 요청→해당 사건 제보 정보 확인 후 사실임을 확인하고 시민 피해상황 알리는 소재로 활용”이라고 적었다. 실제로 이 사례는 2월22일 공사 보도자료에 간략하게 실렸다.
문건에는 장애인단체와 공사의 대결 구도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빗대는 부적절한 비유도 있다. 문건은 ‘배수진의 소수자’(장애인단체) vs ‘뭉쳐도 할 게 없는데 다수의 슬픔’(공사)이라며 공사가 장애인단체와의 대결에서 무기력하다고 지적한다.
서울교통공사 ‘사회적 약자와의 여론전 맞서기’ 문건 갈무리.
해당 문건에 대해 공사 홍보실 언론팀 구종성 과장은 <한겨레>에 “직원 개인이 자유게시판에 올린 문건으로 교통공사의 공식적인 입장도 아니고, 업무 지시를 내린 적도 없다. 아마 (이동권 시위) 현장을 나가는 직원들끼리 ‘너무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알아서 (문건을) 만들어서 자유게시판에 올린 것 같다”고 밝혔다.
이날 공사는 ‘사과문’을 내고 “시민 여러분께 진심 어린 사과를 드린다. 재발 방지를 위해 직원에 대한 교육을 다시금 철저히 실시하는 것과 동시에 지하철 내 교통약자의 이동권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해 확보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전장연은 “서울교통공사의 무책임한 꼬리자르기 행태에 더 분노한다. 이는 개인 일탈이 아닌 조직의 잘못으로, 서울교통공사 사장은 공개적인 방식으로 공식사과하고 즉각 사퇴하라”고 비판했다.
서울교통공사 ‘사회적 약자와의 여론전 맞서기’ 문건 갈무리.
서울교통공사 ‘사회적 약자와의 여론전 맞서기’ 문건 갈무리.
박지영 기자
jy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