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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시뻘건 불길 위기, 비상소화장치 덕에 마을 지켜내”

등록 2022-03-08 18:59수정 2022-03-08 19:09

강원 주민들, 인접 야산에 물 뿌려
초기 방어선 구축해 피해 최소화
도, 2년 전부터 산불 취약지역에
소화장치 800여개 설치한 효과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 주민이 비상소화장치를 이용해 주택 인근에 물을 뿌려 방어선을 구축하는 모습. 강원도소방본부 제공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 주민이 비상소화장치를 이용해 주택 인근에 물을 뿌려 방어선을 구축하는 모습. 강원도소방본부 제공

“시뻘건 불길이 춤을 추듯 넘실거리고 불씨가 우박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촉즉발의 위기였지만 비상소화장치 덕분에 마을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강원도 동해에 사는 장재섭(78)씨는 지금도 지난 5일 아침 상황만 생각하면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이날 새벽 1시20분께 강릉시 옥계면 남양리에서 난 불이 바람을 타고 이날 새벽 5시30분께 동해시 망상동을 지나 오전 10시께는 발한동에 있는 묵호초등학교까지 위협했다. 당시 동해는 도심 곳곳을 위협하는 산불 탓에 도심을 빠져나가려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대피 방송, 소방차 사이렌 등이 섞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또 산불 연기 탓에 도심이 잿빛 하늘로 뒤덮이면서 햇빛도 완전히 가려 시야조차 제대로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장재섭씨는 묵호초등학교 뒷산에서 불길이 이는 것을 보자마자 산불 초소 옆에 설치된 비상소화장치부터 열었다. 이곳에서 길이 100m에 이르는 긴 호스를 끌고 올라가 불이 붙은 곳을 향해 노즐을 돌렸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집에서 나와 근처를 서성이던 주민들도 한마음 한뜻으로 장씨를 도왔다. 강한 물줄기가 콸콸 뿜어져 나오자 거세게 번지던 불길은 어느 정도 잡히기 시작했고, 곧이어 소방차와 진화대원까지 도착해 산불 진화에 나섰다.

장재섭씨는 “소화전과 호스가 미리 연결돼 있어 주민 누구나 큰 어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소화전에서 직접 뺀 물줄기라 수압도 세고 멀리까지 물이 뻗어 나갔다. 이 일대에 주택 20채 정도가 있는데 비상소화장치 덕분에 한 곳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강원도 동해시 동호동 주민이 비상소화장치를 이용해 주택 인근 화재를 진압하는 모습. 강원도소방본부 제공
강원도 동해시 동호동 주민이 비상소화장치를 이용해 주택 인근 화재를 진압하는 모습. 강원도소방본부 제공

비상소화장치는 동해뿐 아니라 울진·삼척 산불에서도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에 사는 홍동기(81)씨는 “울진에서 난 불이 산을 타고 인근까지 번졌다. 10여 가구가 산불로 피해를 볼 위기였는데 주민들이 모두 나와 비상소화장치를 열고 주택과 인접한 야산에 물을 뿌려 방어선을 구축하는 등 초기 진화에 나서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강원도가 산림 인근 마을에 설치한 ‘비상소화장치’가 이번 산불에서 주택가 피해 확산을 막는데 한몫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상소화장치 사업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산불 위험 취약지를 선정해 주택가 인근에 소화전과 소방호스를 설치하는 것이 뼈대다. 산불 피해에 노출된 산간마을은 대부분 소방차가 도착하기까지 30분 이상 걸려 ‘골든 타임’을 놓치거나 이번과 같이 대형 산불 발생시 동시 다발적으로 화재 현장이 발생하다 보니 소방차가 모든 현장에 출동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데 화재 초기 주민 스스로 인명·재산 피해를 막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이 사업은 2019년 동해안 산불 당시 고성군 토성면 용촌리 주민들이 마을공동 경비 100만원을 들여 설치한 소화전으로 밤새 산불과 사투를 벌여 주택 23채 가운데 19채를 지켜낸 사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강원도는 정부에 국비 50%를 지원받아 다음 해인 2020년부터 산불 취약지역인 동해안 6개 시·군에 820개를 설치했다. 총 사업비는 70억원으로 비상소화장치 1개당 850만원 정도가 든 셈이다. 강원도소방본부 방호구조과의 홍병화 소방경은 “바람이 강하게 부는 동해안은 산불 발생시 특히 초기 진화가 중요하다. 산불 발생에 따른 인명·재산 피해 등을 고려하면 예산 대비 효율이 높다. 출동한 소방차에 물도 보충할 수 있어 끊김 없는 화재 진화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강원도 동해시의 한 주민이 비상소화장치를 이용해 주택 인근 산불을 진압하는 모습. 강원도소방본부 제공
강원도 동해시의 한 주민이 비상소화장치를 이용해 주택 인근 산불을 진압하는 모습. 강원도소방본부 제공

실제 동해시도 지난 5일 산불이 발생해 소방력이 부족해지자 주민들에게 안내 메시지를 보내 “옥내소화전이나 비상소화장치 등을 이용해 날아드는 불길을 잡길 당부드린다”고 요청했다. 지난해 11월24일에는 건조주의보가 발효 중인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의 한 야산에서 산불이 나자 이를 발견한 주민들이 동네 입구에 설치된 비상소화장치를 활용해 산림 30㎡만 태운 채 산불을 초기에 진압했다. 이 사업은 2021년 5월에는 소방청 주관 적극행정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강원도는 국비를 확보해 1360곳에 추가로 비상소화장치를 설치할 계획이다.

동해시 동호동에 사는 박은실(58)씨는 “지난 5일 아침 집 뒷산까지 불이 넘어왔지만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비상소화장치에 달려들어 화재 진압을 도왔고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장치가 없었으면 다들 자신의 집이 타는 걸 보며 발만 동동 굴렀을 것이다. 산불로 피해 우려가 있는 동해안 모든 시·군으로 사업이 확대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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