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을 함께 해온 동지인 이부영(왼족)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과 장영달(오른쪽)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이사장. 사진 몽양기념사업회 제공
“정경모 선생 묘비 건립에 힘을 보태주십시오.”
지난 4월 50여년 만에 넋으로 귀국한 ‘마지막 망명객’ 정경모 선생은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잠들어 있다. 지난 9월엔 1989년 ‘4·2남북 공동성명’의 주역인 문익환 목사·박용길 장로 부부, 유원호·안순심 부부의 묘가 바로 옆으로 이장을 했다. 그 마무리 작업으로 정 선생의 묘비를 세우기 위한 모금 운동이 진행 중이다.
“세 분 ‘통일의 씨앗들’을 나란히 모셔 30여 년 만에 영혼으로나마 재회를 하신 모습이 감격스러웠지요 그런데 정 선생의 유족들이 코로나 사태 등으로 참석을 하지 못해 묘비를 미처 마련하지 못했어요. 더구나 정 선생과 동갑인 부인은 일본인이지만 ‘한국 국적’이어서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하니 형편도 넉넉하지 못한 듯해요. 뒤늦게나마 십시일반 정성을 모았으면 좋겠어요.”
자유언론실천재단 이부영(79) 이사장 제안에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장영달(73) 이사장이 선뜻 손을 잡았다. 여기에 늦봄 문익환목사기념사업회까지, 세 단체가 뭉치게 된 ‘고리’는 바로 ‘몽양 여운형’이다.
“정 선생은 일본에서 내내 <씨알의 힘>을 발행한 언론인었어요. 1984년 국내 민주화 운동권에 정 선생 이름을 알린 저서 <찢겨진 산하>도 애초 ‘여운형·김구·장준하의 구름 위 정담’이란 제목으로 <씨알의 힘>에 실린 글이었죠. 또 1985년부터 해마다 ‘여운형 추도식’을 열었고, 그 인연으로 북한에 있던 몽양의 딸 여연구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공동의장과 연결이 됐어요. 1989년 세 분의 방북도 여 의장의 초청으로 시작됐죠.”
이 이사장은 2006년 몽양기념사업회 설립과 이듬해 <여운형을 말한다>(이정식 저) 발간 등을 주도한 이래 2020년까지 이사장을 맡았고, 지금도 명예이사장으로 간여를 하고 있다.
“이 이사장과는 오래 전부터 민주화운동 선후배로, 몽양기념사업회 설립에 참여해 내내 부이사장 등으로 힘을 보태다 올 봄부터 이사장 자리까지 물려받았어요. 정 선생과는 생전에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몽양 정신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추모 작업에 동참하기로 했어요.”
장 이사장 말대로, 둘은 1970년대부터 반유신독재 투쟁을 하다 옥중에서 첫 조우한 ‘감방 동기’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 시절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를 결성하고 이듬해 ‘자유언론실천선언’ 발표를 주도하다 해직된 이 이사장은 이후 긴급조치 위반·반공법 위반 등 혐의로 7년간 옥살이를 했다. 장 이사장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되어 역시 7년간 복역했다. ‘10·26’ 이후에도 풀려나지 못한 두 사람은 80년 대전교도소에서 수개월간 함께 지냈다.
“보안법 위반 혐의도 없었는데, 전향서 쓰기를 거부한 괘씸죄로 1981년에야 풀려났어요. 그뒤 83년 민청련 결성 때 김근태 의장과 더불어 부의장을 맡아 해직언론인들을 자문위원으로 모시면서 이 이사장과 다시 만났어요. 85년 민통련 결성 때 문익환 의장·이부영 사무처장에 이어 제가 총무국장을 맡으면서 여러 차례 수배와 도피, 체포·투옥의 고난을 함께 하게 됐지요.”
민주화 이후 각각 정치에 참여한 두 사람은 한때 여·야로 진영이 엇갈려 맞서기도 했지만 ‘몽양 추모’를 통해 의기투합한 것이다.
“정 선생 묘비는 4·2남북공동성명 33돌인 2022년 4월 2일 제막할 예정입니다. 혹 남는 후원금은 ‘통일의집’에 전달해 ‘통일의 씨앗들’ 추모 사업에 보탤 것입니다.”
묘비 후원 모금은 1만원 이상 12월31일까지 계좌(농협 301-0240-3680-71 자유언론실천재단)로 참여할 수 있다.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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