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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일그러진 청년서사 ‘설거지론’…그들은 왜 여성들을 노리나

등록 2021-11-07 09:05수정 2021-11-07 10:20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누구나 살다 보면 어느 정도는 이상해질 수밖에 없는 시기가 있다. 대학 졸업하고 구직할 때가 그렇다. 분명히 사회가 하라는 대로 다 열심히 한 것 같은데 기대와는 다르게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상념은 원한으로 누적된다. 하고 싶은 것들 참아가면서 따랐던 ‘사회가 하라는 것’에 대한 원한이다.

주목경제 시대에 사실상 모든 재화는 그 가치를 부여받기 위해서 인간의 주목이 필요하다. 그것의 사용가치만으로는 값이 제대로 매겨지지 못한다. 손목시계를 예로 들면, 그로부터 기대되는 바의 기능은 시간을 확인하는 것을 훨씬 웃돈다. 가격 차이가 백배, 천배 이상 나는 두개의 손목시계가 실제 성능 차이도 그만큼 난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손목시계의 가격을 높이는 것은 브랜드, 기호다. 고가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는 상류층의 기호, 평범한 장삼이사와 나를 구별 짓는 기호에 비싼 값이 매겨진다. 이 기호를 제값에 팔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의 주목이 없어선 안 된다. 성능 면에서 대동소이한 상품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품질만큼 마케팅에 전력을 쏟아야 한다.

사회 요구에 ‘관종’도 마다않았지만
불공정·불평등 퍼진 사회 겪은 뒤

노동력도 주목받아야 하는 시대

주목경제의 논리는 인간의 노동력에도 해당한다. 인간의 노동력이 제값을 부여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역시 주목이 필요하다. 사람은 많은데 대학 진학률은 갈수록 올라가며 학력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전반적인 작업 역량과 교양 수준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이제 구직자들은 자격증, 외국어 실력 등 스펙을 넘어 그 이상의 무언가를 과시해야만 하게 되었다. 신규 채용도 갈수록 줄어듦에 따라 지금 청년 구직자들은 치열한 스펙 경쟁에 주목 경쟁의 부담까지 짊어져야 한다.

일을 얼마나 잘할 준비가 돼 있고 얼마나 많이 공부했는지만큼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얼마나 잘 뽐낼 수 있느냐다.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주목이 가치를 결정하는 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때에 따라서 어느 정도는 ‘관종’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원래 모습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비춰지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가꾸는 것을 넘어 그것을 더 많은 사람의 눈에 보이게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관종이라는 말은 더 이상 조롱이 담긴 멸칭이 아니라 현대인 혹은 ‘신인류’의 특징으로까지 거론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관종은 욕으로 쓰였지만 이른바 ‘좋은 관종’도 있으며 모두가 좋은 관종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관종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임홍택 작가는 21세기를 리드하는 좋은 인재가 되기 위해 좋은 관종이 되기를 요구한다. 겸손함이 미덕인 시대는 갔다. 자신의 역량을 과하지는 않게, 적당한 수준으로 적절한 때에 적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만 유능한 인재로 눈에 띌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 유능한 인재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 스펙뿐만 아니라 인격도 도야해야 하고 가식이라도 떨면서 착한 척하며 봉사 활동도 해야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더 치열한 주목 경쟁과 항시적인 인정투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사회가 하라는 건 다 한 것 같은데 괜찮은 일자리는 좀처럼 구해지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누구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 너무 쉽게 정규직이 되는 것 같고, 공정과 평등을 외치던 정치인들이 특권을 이용해 자식들을 명문대에 보내거나 좋은 데 취직시키는 사례가 너무 많이 눈에 띈다. 착한 척, 가식은커녕 일체의 사회적 의례를 무시해버리고 금도를 완전히 깨버리는 ‘선 넘는’ 콘텐츠로 일약 스타 유튜버가 되어 떼돈을 버는 사람도 너무 많이 보인다. 지켜야 할 것 다 지키며 살아왔던 자신만 손해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는 당장 하고 싶은 것들 조금만 참고 노력하면 언젠가 성공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듣기 좋은 말만 하던 기성세대, 위정자들의 저 위선에는 치가 떨린다.

위선을 향한 분노는 뚜렷한 기대 이득과 성과가 보이지 않는 끝없는 인정투쟁에 대한 환멸과 겹치면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일말의 의례, 예의범절, 가식, 가면 일체를 내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자극하곤 한다. 지금 20대 안에서 지고의 가치관으로 자리 잡은 ‘위선은 나쁘다’라는 명제는, 특히 위악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의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에 익숙한 20대 남성들에게 자신들의 (적어도 웹상에서나마의) 반사회적 언행들을 정당화하는 명제가 된다. 이들은 인터넷을 떠도는 온갖 ‘사이다’ 썰, 예컨대 ‘맘충’이나 ‘잼민이’들을 ‘참교육’했다는 경험담들을 읽으며 파워트립의 환상에 젖어들고, ‘어느 누구도 감히 그러지 못하지만, 유일하게 용기를 내서 상대방에게 일침을 빙자한 폭언을 시원하게 퍼붓는 나’를 상상하며 조커에 빙의한다.

“위선” 핑계로 잇단 반사회적 행동
약자인 여성·어린이 공격대상 삼아

자기 합리화 위해 약자를 저주

그리고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한 최소한의 매너까지 내던져버린다. 교사들로부터 ‘공부를 더 하면 아내 얼굴이 달라진다’라는 말을 들으며 성장한 이들에게 구애 활동이란 구직 활동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구직 활동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해도 어차피 운 좋게 잘생기게 태어났거나 돈 많은 사람들에게 이성을 빼앗기므로 잘 보이려고 노력해봤자 부질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는다며 여성들을 저주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변변한 일자리도 못 구하고 연애 및 결혼에도 실패한 자신의 쓸쓸한 신세에 상대적 우월감이나마 얻고자 상상으로 밟고 오를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을 찾아다닌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대상은 여성과 어린이 외에는 별로 없다. 그래서 만들어낸 서사가 이른바 ‘설거지론’이다. 새롭게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역사가 유구한 ‘취집’ 서사와 다른 건 전혀 없는데, 여성을 욕하는 것을 넘어서 ‘취집하는 여자’와 ‘결혼한 남자’에 대한 조롱이나 연민이 한 층위 더해진 것이다. 조롱이든 연민이든 핵심은 결혼 못 한 내가 결혼한 남자 혹은 ‘퐁퐁남’보다 차라리 낫다는 위안이다. 보잘것없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아침밥 차려주고 도시락 싸주는 여자를 기다리며 결혼을 미루는 내’가 현명한 것이라는 위안이다.

미디어문화 연구자. 첫 책 <프로보커터>에서 극단적 도발자들의 ‘나쁜 관종’ 현상을 분석했다. 한국의 20대 현상과 좌파 포퓰리즘, 밈과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같은 디지털 현상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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