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님을 환자로 돌본 지 3년 만에 처음 먼저 연락을 받았다. 약을 처방하고 방문진료를 할 수 있으니까, 기필코 당뇨를 호전시켜보리라. 언스플래시 제공
“선생님, 약이 다 떨어졌어요.”
예상하지 못한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수정(가명)님이 먼저 약이 떨어졌다고 전화를 준 경우는 처음이었다. 3년째 만나고 있지만 약을 잘 먹고 있는지 확인이 어려웠다. 항상 잘 복용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 당뇨 수치는 개선되지 않았다. 만나서 매번 하는 일이 당뇨병의 위험성을 설명하고 꾸준한 약 복용을 강조하지만 효과가 없어 스스로 반성을 한다. 약을 왜 안 먹는지 추궁도 해보고, 속이 불편하다고 해서 약도 바꿔보고, 소화제도 추가하는 등 여러 시도를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40대 초반 수정님은 건강 관리에 소홀하다. 비교적 젊은 나이라 불편함이 없어서 그런지 매번 심각한 이야기를 드려도 그리 놀라지 않는다.
병세 나아지지 않아 낙담한 날들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3년 전 동주민센터 담당 공무원의 의뢰로 보건소 방문건강관리팀과 함께 찾아가 수정님을 처음 만났다. 그 이후로 꾸준히 찾아뵙고 약도 드리고 건강 관리를 돕고 있다. 당시엔 남편과 별거해 세 자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수정님은 남편과 이혼했지만 가까운 거리에 살며 서로 종종 만난다고 했다. 인연을 맺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에 살던 남편이 사망하였고 우연히 소식을 들은 나는 장례식을 찾아 위로를 전하기도 했다. 수정님은 남편도 그동안 과음으로 간이 망가졌다고 걱정하여 나는 꼭 함께 찾아뵙자고 하였지만, 한번을 찾아뵙지 못하고 고인을 장례식에서야 만났다.
그 이후로도 수정님에게 매달 연락하고 찾아갔으나 전화를 받지 않거나 집에 안 계셔서 못 만나기도 했다. 질병도 호전되지 않고 내 진료가 소용이 없어 자책했다. 인연이 아닌가 낙담하여 마음을 거두려 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처방을 드린 지 한달이 될 때쯤 잊지 않고 연락을 드렸다. 다행히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인연이 이어졌다. 몇달 전엔 이사 간다고 하였다. 우리 병원 기준으로 지금 사는 곳보다는 멀어졌지만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여서 계속 찾아뵙겠다고 했다. 집들이 선물로 두루마리 휴지와 두유 한 묶음을 드렸다. 이사 간 이후에도 혈액 검사 수치는 여전히 좋지 않지만 한달에 한번 약을 드리고 있다. 얼마 전 찾아뵐 때가 되어 나름 금요일쯤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전 방문 일정이 꼬여 못 가고 다음주에 연락드리고 찾아뵈려고 했는데 다음날인 토요일 마침 전화가 왔다.
3년 만에 처음으로 약이 떨어졌다고 먼저 전화를 주었다. 약을 꾸준히 잘 먹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어 잘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었는데, 그 전화가 참 반가웠다. 전화를 받고 바로 찾아뵈었다. 얼마 전 시행했던 혈액 검사 결과를 다시 설명하며 약을 꾸준히 먹을 것을 당부했다. 당뇨 상황이 나쁘지만 약만 꾸준히 먹으면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쉬운 일은 아니다. 그동안 여러 일을 겪었고 자녀들을 돌보는 일도 쉽지 않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마음 한구석 무거웠던 가족의 삶
꽤 오래 찾아뵈었지만 사실 나는 수정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수정님은 속 시원하게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한 적은 없다. 그래도 내가 제법 익숙해져서인지 요즘은 나한테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수정님은 항상 내 마음 한구석 무겁게 자리하고 있다. 혹시 언론에 나오는 가족의 비극의 당사자가 이런 상황이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자연스레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관공서에서는 수정님 가정을 도우려 하지만 가끔 오는 듯 마는 듯 하다. 이사 이후에는 코로나19까지 겹쳐 돕는 손길이 더 적어졌다. 어쩌다 올 때는 이것저것 문제를 지적하다가도 갑자기 인연이 끊긴다. 나 역시도 방문 의사로 만나고 있지만 개선되지 않는 당뇨 결과를 보며 이젠 그만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입원 치료를 받거나 더 실력 있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닌지 수차례 생각했다. 여전히 그런 생각이 마음속에 있다. 비교적 젊어서 당장은 괜찮아 보이지만 서서히 몸이 망가지고 있어 걱정이다. 꾸준히 약을 먹고 관리를 하면 수정님이 남은 생을 건강히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시간이 지났고 3년이 지나서 처음으로 약이 떨어졌다고 먼저 연락받았다.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늦지 않게 찾아뵙고 교육하고 건강 관리를 도와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기필코 당뇨를 호전시켜보리라는 오기도 생긴다. 나에게 대단한 기술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약을 처방해드릴 수 있고 또 찾아갈 수 있으니까.
짧은 안부 문자가 반가워
“추석 잘 보내세요.”
간단한 추석 안부 문자를 주시는데 너무 짧은 단문이 수정님답기도 하고 안부 문자를 먼저 주시니 그동안 만난 수정님이 맞는 건지 생경하다. 연휴 끝나고 찾아뵙겠다고 반갑게 답장을 보냈다. 매번 낙심하지만 건강 관리를 돕기 위해 계속 찾아가보는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뿐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내가 결과를 미리 재단할 필요 없지 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요즘 수정님 댁 문을 두드리면 즐겁게 대화하던 가족들이 진료를 위해 자리를 피해주려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되레 미안해서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가족들의 대화 속에 내가 들어가진 못해도 가족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아프고 힘든 삶이겠지만 잘 버텨주길 나름의 기도를 한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인연을 이어가며 가족의 삶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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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원 찾아가는 의사남의 집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꿈도 계획도 없다. 내 집도 남이 드나들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방문을 허락하는 이들이 고맙고, 그 고마운 이들과 오랫동안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