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소장실에서 포즈를 취한 백태웅 유엔 강제실종 실무그룹 의장. 사진은 백태웅 의장이 보내준 것이다.
영화 <1987>을 보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숨진 박종철씨가 경찰에 끌려간 사실을 그가 죽기 전까지는 가족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정부가 직·간접으로 개입해 본인 의지에 반하는 자유의 박탈, 체포, 구금 또는 납치를 하는 걸 ‘강제실종’이라 부른다. 유엔은 1980년 이를 중대한 인권침해로 규정하고 인권위 산하에 ‘강제실종 실무그룹’(WGEID)이란 기구를 만들었다. 백태웅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 겸 한국학연구소장이 이 기구의 의장이다. ‘강제실종’은 지금도 전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극단적인 인권침해 사례라고 백태웅 의장은 말했다.
젊은 시절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해 혁명적 노동운동을 꿈꿨던 백태웅 의장은 1980년대 학생운동권의 스타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7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학위를 받고 그곳에서 대학교수가 됐다. 2004년부터 유엔 인권활동에 참여해, 2015년 강제실종 실무그룹 위원에 선임됐고 지난해 10월 임기 1년의 의장을 맡았다. 대표적인 ‘586세대’인 백 의장이 조금은 떨어져서 바라보는 한국사회 핵심 이슈들은 어떤 모습일까, 얘기를 들었다. 하와이에 있는 백 의장과의 인터뷰는 8월29일 줌 영상통화로 이뤄졌다.
― 지난해부터 유엔 ‘강제실종 실무그룹’(WGEID) 의장을 맡고 계신데, 코로나 때문에 활동에 어려움이 클 거 같습니다.
“지난해 6월 이후에 세차례 회기를 모두 온라인으로 진행했고, 오는 9월에 1년반만에 대면 회기를 진행하려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코로나 상황이 실종자들과 실종자의 행방을 찾는 가족들에게 주는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는 겁니다. 지금도 많은 국가에서 테러나 보안 문제를 이유로 정규 구금시설이 아닌 곳에 사람을 수감하고 고문하고 그러는데, 실종자 가족들의 접근을 코로나를 이유로 아예 막아버리니까 예전보다 (실종자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 이번에 한국이 아프가니스탄인 390명을 특별기여자란 이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난민에게 매우 까다로운 우리 정부 태도나 사회 분위기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인데요, 난민과 실종 문제는 좀 다르긴 하지만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한국의 위상이 국제사회에서 높아졌고 그런 만큼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많은 사안에서 우리와 직접적으로 (이해가) 닿지 않으면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정부의 외교 역량과 국제사회 활동수준이 높게 나타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사실 난민과 실종 문제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닙니다. 난민들이 국경 넘어서 피신하다가 실종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중앙아시아나 파키스탄으로 넘어갔다가 이들 국가가 다시 송환하는 과정에서 실종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난민에 대한 대응은 어느 나라가 한 개인을 받아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 인권 수준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시험대라고 봅니다. 그 점에서도 한국정부의 이번 결정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2017년 유엔 강제실종 실무그룹 위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제네바 유엔본부 대강당에서 다른 위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 앞으로도 아프가니스탄에선 탈레반 정권의 보복을 피하려 대규모 난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제사회가 아프가니스탄 난민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 나가야 할까요?
“새 탈레반 정부가 우선 난민들을 발생하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원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의 자유를 허용하고, 외국에서 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접근권을 요구할 때 이를 보장하고, 새 통치세력이 국제사회가 부여한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국제난민협약에 따르면, 난민은 어느 나라나 수용해야 하는 게 국제법적 의무입니다. 난민 상황을 고려하면서 국제사회가 돕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우려되는 점은 많습니다. 특히 (아프간 난민들이) 대거 산악지대의 국경을 넘다가 큰 비극이 나올 가능성이 있어 걱정이 큽니다. 탈레반 정부와 국제사회가 대화하면서, 협력해서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정부도 적극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주길 기대합니다.”
백태웅 의장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서울대 법대 1년 선배로 친분이 깊다. 젊은 시절엔 조 전 장관과 함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활동을 함께 했다. 그는 몇 달 전 조국 전 장관 부인 정경심씨 재판과 관련해서, 2019년 5월15일 열린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 세미나에서 조 전 장관의 딸을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눴고 그런 내용의 사실확인서를 검찰에 제출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적이 있다. 조 전 장관 딸의 세미나 참석 여부가 쟁점이 되던 시기였다.
― 백 의장의 확인서 제출에도 2심 재판부는 인권법센터 인턴 문제를 포함해 7개의 경력확인서를 모두 허위로 판단하고 정경심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습니다. 2심 판결 결과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조국 교수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대응은 참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조국 교수의 모든 가족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이 과정은 어떻게 끝이 날지 앞이 보이지 않는군요. 1980년대의 폭압 시절에도 검찰은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먼지털 듯 탈탈 털어서 기소하지는 않으려 했고, 법원은 인간의 얼굴을 하기 위해 노력을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검찰의 구속과 기소, 엄벌주의가 너무 남용되고 있어요. 법원과 검찰이 사회정의의 보루일 수 있는 것은 국가 공권력을 금도있게 사용할 때입니다. 솔직히 저는 너무 많은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고 믿어요. 제가 도합 7년 이상 감옥살이 했는데, 감옥 안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도 감옥 밖에서 가장 불행했던 날보다 못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법절차, 특히 형사법 절차가 시민의 삶을 너무 깊숙이 침해하는 사회는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체험학습과 인턴의 차이를 법원이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한다는 것은 좀 코미디 같은 느낌입니다.”
― 조국 전 장관이 너무 가혹한 형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예,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2018년 6월 강제실종 문제 조사를 위해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백태웅 교수.
― 조 전 장관을 둘러싼 논란을 시작으로 ‘공정과 정의’에 대한 젊은층의 강렬한 요구가 분출했습니다. 한국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공정과 정의’ 담론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촛불은 한 시대를 마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변화의 상징이고 청년들에게 온 기회입니다. 촛불시위 이후에 우리 사회는 몇 가지의 새로운 화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여성들의 권리를 신장하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만연한 차별과 불평등을 넘어 노동자까지 아우르는 선진적 사회를 만드는 것, 마지막으로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길을 제대로 여는 일입니다. 청년층의 건강한 에너지가 이러한 시대적 문제들을 풀어내는 것과 연결되는 건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공정과 정의’가 기득권의 옹호와 결합되어 버리는 의외의 사태를 보기도 했습니다. 이는 기존 정치권의 정치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밀레니얼 세대의 에너지 분출방법은 기존 정치문법과는 꽤 다르지만, 이를 끌어안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세대가 더 많은 역할을 하게 해서 성숙한 리더십을 키워내야 지금의 과도적 현상이 극복되지 않을까요?”
― 공정과 정의가 기득권의 옹호와 결합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은, 결과의 평등을 고려하지 않은 능력주의의 폐해를 지적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7월에 심포지엄 참석차 서울에 갔을 때 외교부청사 주변에서,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문화란 이름의 외국인노동자 특혜에 반대한다’라고 1인 시위를 하는 분을 봤습니다. 그 분은 과연 그 말이 당사자(외국인노동자)들에게 미치는 폭력적 결과를 이해하고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자기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노력과 그게 실질적이고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인간다움이나 정의로움, 공정과 배치되는 것은 이율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인권의 기본정신은 기계적 평등이라기보다는 배분적 정의입니다. 정의가 실질적으로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하고, 평등의 문제도 그렇게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의 학생운동 리더 중 한사람이 백태웅 의장입니다. 흔히 말하는 586세대의 핵심인 셈인데요, 최근 586세대에 대한 평가, 특히 젊은 세대의 평가는 썩 긍정적이진 않은 거 같습니다. 요즘 쏟아지는 586세대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586세대에 대한 공격은 일정한 정치적 의도에 의해 부추겨 지는 면도 있지만, 그것이 젊은 세대의 적극적 역할을 분발하게 하는 측면이 있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대 담론을 절대적으로 믿지는 않는 편이고, 한 사회를 세대 단위로 진단하는 것에도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또 요즘 젊은이들의 고통만 강조하는 것도 과연 적절한 것인지 의문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교육수준과 기대수준도 높고, 또 여행 경험도 많고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단지 사회적 최저선의 보장과 약간의 금전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으로 우리 사회가 할 일을 다했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요? 더 많은 젊은이들을 정치에 참여시키고, 발언의 공간을 열어주고, 청년들 스스로가 사회의 주역이 될 기회를 폭넓게 제공해 주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 586에 대한 공격이 정치적 의도에 의해 부추겨지는 측면이 있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청년층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세대 차원’으로 접근하다 보니까 586을 적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담론을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586은 한 세대일 수는 있겠지만 세력은 아닌데, 한 세대 전체를 공격하는 게 청년들이 구체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풀어야 하는 문제들을 넘어서는 데 어떤 도움을 줄까요? 오히려 청년들이 스스로 리더십을 갖는 걸 가로막는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누군가를) 하나의 세력으로 놓고 공격하는 접근 자체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풀어나가야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흐리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정한 정치적 의도를 가진 담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586’이라는 딱지를 붙이기보다는 (개별 사안사안에) 구체적으로 접근해서 문제를 푸는 게 더 효과적일 겁니다.”
2015년 유엔 강제실종 실무그룹 위원으로 선임된 백태웅 교수가 스리랑카를 방문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사노맹 사건 이후 미국에서 학위를 딴 뒤 귀국하지 않고 해외에서 교수 생활과 국제기구 활동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지금 생활에 만족하십니까?
“대학 교수로 지낸 것이 어느새 만 18년이네요. 저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미국에 올 때 과거를 넘어서 깊은 성찰 속에서 제대로 된 시각으로 한국과 세계를 보고 싶었습니다. 대체로는 묵언 정진하려고 노력했구요. 이제는 좀 활동적이고자 합니다. 유엔 활동을 계기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엔에서 일하면서 목격한 것은, 인간의 비극 중 많은 부분이 가까이 지내는 이웃과 동족의 핍박과 갈등에서 기인한다는 것이에요. 지금 세계는 문명의 도전을 맞고 있어요. 카불의 비극, 비행기 날개에서 추락하는 난민의 모습을 보세요. 아프간의 구조 요청이 연일 접수되고 있고, 미얀마 라오스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그리고 이란 이라크 이집트 수단 예맨 부룬디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 도처에서 말할 수 없는 비극을 목격하게 됩니다.
지금 강제실종 실무그룹 의장을 맡고 있는데,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유엔의 이름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입장을 일정 정도 대변하는 것은 뜻깊은 것 같아요. 실종 상태에서 고문실이나 비밀감옥에 있다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오는 사람을 보는 것은 매우 큰 감동이고, 반면 도처에서 계속되는 인간이 인간을 핍박하는 야만에 분노를 느낍니다. 앞으로 한국과 거리를 더 좁히고, 더 한국적으로, 그리고 더 세계적인 시야를 아우르며 활동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북한 정부에 강제실종 관련 정보를 요청한 사례가 316건이라는 기사를 봤습니다. 이런 요청에 대해 북한정부 태도는 어떤가요? 변화의 조짐이 있습니까?
“인권에 대한 북한정부 태도에 변화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유엔이 5년에 한번씩 인권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국가별 정례인권검토(유피알·Universal Periodic Review)라는 걸 보내는데, 2009년 첫 유피알 때는 국제사회가 요구한 모든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2014년엔 114건은 받아들이고 60여건을 거부했고요, 가장 최근인 2019년엔 197건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북한이 유엔과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인권 기준을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실질 개선을 위해선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 험합니다. (국제사회의) 더 많은 관여와 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316건의) 강제실종 케이스 중엔 한국전쟁중 실종도 있고 1960~70년대 한국과 일본에서 납북된 피해자들도 있고, 최근 탈북 이후에 송환돼 실종된 분도 있습니다. 북한정부는 이런 사안을 정치적 공격을 위해 제기한다고 봐서 모두 거부하는데, 이제는 인권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 남한의 진보 세력이 북한인권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한의 진보 세력 뿐 아니라 미국도 핵 문제가 나오면 북한인권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때론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핵 문제 해결 노력이나 인권 문제 해결 노력이나 서로 연결돼 있는 겁니다. 핵 문제에서 한꺼번에 모든 걸 다 해결하는 접근은 불가능하고, 동결-감축-폐기로 나가는 단계적 접근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조건 봉쇄가 아니라 실질적 관여를 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인권 문제를 얘기하고 개선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해야 합니다.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북핵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이런 과거의 편견을 극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진보도 북한 인권을 제기하면 (보수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을까 우려하는데, 저는 그런 우려에 반대합니다. 지금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로 나가는 데서 특정 문제를 피하고 숨기고 넘어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북한도 인권 대화를 무조건 피하지는 않습니다. 유럽 국가들과는 수교 과정에서 이 문제를 얘기합니다. 진보가 (북한 인권에) 너무 소극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선임논설위원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