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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난민 취재하던 내가 난민이…이제 다시 기사를 써보려 합니다

등록 2021-08-22 09:13수정 2021-08-22 09:27

[한겨레S] 이란주의 할 말 많은 눈동자
이집트 기자 샤이마
이집트 진보언론 ‘라스드’ 기자 출신군부 쿠데타로 언론인 1500여명 체포
시리아 난민에 대한 기사를 쓰던 이집트 기자 샤이마(32·여성)는, 지금은 자신이 난민이 되어 대한민국을 겪고 있다. 쿠데타 정권의 탄압을 피해 나라를 떠난 지 3년, 삶과 미래에 대한 고민은 깊고 막막하다.

일러스트레이션 순심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순심 작가

이집트 군부 쿠데타 이후의 삶

우리 가족이 어쩌다 한국에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하자면 좀 길어요. 이집트 시민들은 2011년 혁명으로 30년간 이어진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민간 정부를 세웠지만, 2013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인권 상황은 극한으로 치닫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종되고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특히 2013년 8월14일은 참혹했어요. 이날 카이로 라바아광장에서 쿠데타에 항의하던 시민들을 향해 군부가 발포하여 1천명 가까이 희생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진보 언론사 <라스드>(RNN, Rassd News Network)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내 동료들도 많이 죽고 다쳤어요. 라스드는 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고 나는 동료들과 함께 숨어서 일했어요. 그 뒤로 소속되었던 두 언론사도 역시 폐간되고 동료들이 잡혀갔어요. 언론의 자유는 다 무너지고 무지한 검열과 처벌이 이어져 지금까지 1500명도 넘는 언론인이 체포당했어요.

일할 곳이 없어지면서 나는 집에서 기사를 썼어요. 인권운동을 하던 남편도 운동을 이어갈 수 없자 함께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썼습니다. 감시가 심해져 우리는 여행이 금지된 지역으로 옮겨 다니며 활동을 계속했어요. 안전을 위해 기사에 우리 이름도 넣지 못했죠. 각 지역으로 숨어든 기자들은 조심스럽게 연락하며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 안부를 챙겼어요. 그러던 중 우리에게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집트 내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외국으로 가자. 우리는 급히 결정했어요. 하지만 어느 나라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어요. 외국 공관을 찾아가 비자를 신청할 형편도 아니었죠.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 네팔을 선택했어요. 어린 딸을 데리고 이집트를 떠나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어요. 내게는 전남편과 사이에 낳은 아들이 있어요. 그 아이도 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전남편의 동의를 받을 수 없어 그냥 두고 왔습니다. 비밀스럽게 움직이느라 떠난다는 소식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했어요.

한국 와 남편 임금 떼이고 부당 처우
아랍 여성에 편견 있지만 용기 낼 터

난민 취재하던 내가 난민이 되다

네팔을 거쳐 도착한 한국은 예상 그대로였어요. 눈이 많이 오고 항상 겨울인 나라, 한국. 나는 드라마 <겨울연가>를 보며 한국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가볍게 움직이기 위해 짐을 줄여야 했던 우리는 겨울옷만 몇가지 챙겨 왔어요. 한국에서는 우선 이 옷으로 버티자. 인천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바로 난민인정신청을 했어요. 공항에서 며칠 지내며 많은 서류를 작성했어요. 왜 한국에 왔는지, 왜 난민인정신청을 하는지 인터뷰도 했어요. 쉽지 않은 시간이었어요. 그때 딸아이가 많이 아파서 열과 설사가 심했어요. 네팔에서 뭔가 잘못 먹어 식중독에 걸렸던 듯해요. 그 조그만 몸에서 6㎏이나 살이 빠질 만큼 상태가 나빴어요. 그때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싶다고 하니까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어요. “여기 병원비 비싼데, 돈 있으세요?” 아, 그래요. 우리는 돈이 없었어요. 너무나 슬픈 상황이었어요.

서울로 가라는 말에 우리는 짐을 들고 공항을 나섰어요. 문을 나서자마자 훅 밀려드는 열기, 우왓! 여름이잖아! 하하, 그때는 7월이었어요! 공항에서 지낸 며칠간 어찌나 경황이 없었던지 그제서야 한국이 여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서울에서 아이디카드를 받고…. 우리는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어요. 길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죠. 우리보다 먼저 한국에 온 동료가 한 센터를 알려줬어요. 센터에서 딸아이와 내가 묵을 숙소를 알려줬지만 남편이 갈 곳은 없었어요. 하룻밤을 길에서 떠돈 남편은, 다음날 센터에 다시 찾아갔대요. 갈 곳이 없는데 여기 앉아만 있어도 될까요? 에스엔에스(SNS)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남편을 찾아갔던 나는 울음이 복받쳤어요. 남편은 노숙인들이 여기저기 누워 있는 공원 한편에 지친 얼굴로 앉아 있었어요. 나는 전에 이집트에 찾아온 시리아 난민들을 인터뷰해서 기사로 쓴 적이 있어요. 그때는 그 고단하고 슬픈 여정이 바로 내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한국 와 남편 임금 떼이고 부당 처우
랍 여성에 편견 있지만 용기 낼 터

3년 동안 난민심사만 받고 있지만

한국 생활 3년, 그사이 여러 지방을 떠돌며 살고 있어요. 남편은 일을 구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무척 힘들었어요. 일자리 알선 브로커에게 돈을 뜯긴 일도 여러번이고, 못 받은 임금을 받기 위해 노동청까지 가야 했어요. 이집트인이라서, 또 불안정한 체류자격 때문에 무시당하거나 부당한 처우를 받기도 했어요. 나도 일하고 싶지만 아직 기회가 없었어요. 한국 회사들은 히잡 쓴 여자를 고용하고 싶어 하지 않나 봐요. 덕분에 한국어 공부할 시간을 얻었으니 열심히 배워 일을 찾고 싶어요.

아이가 자라며 교육 때문에도 걱정이 커요. 상이한 언어와 문화 사이에 끼여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를 어떻게 잡아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이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가 아랍의 모든 것보다 훨씬 더 익숙하죠. 아이가 앞으로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게 될지, 어디에 소속감을 느끼게 될지 모르니 고민입니다. 그렇다고 한국과 아랍이 전혀 다른 별세계는 아닙니다. 현대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또 대부분의 사회가 서로 닮아가고 있어서 유사한 점도 아주 많아요. 한국어를 잘하게 되면 그런 기사를 쓰고 싶어요. 한국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삶과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아랍에서 온 아이들 교육에 대해서요. 여기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도, 한국과 아랍이 서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사도 쓰고 싶습니다.

몇개월에 한번씩 비자를 연장하며 3년 동안 계속 난민심사만 받고 있는 상황이 기가 막힙니다. 오래 못 본 아들도 너무나 그리워요. 하지만 그래도 용기 내어 삶을 이어가 보려 합니다. 다시 기사를 써보려 합니다.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일꾼. 국경을 넘어와 새 삶을 꾸리고 있는 이주민들의 그 이야기를 풀어내 당사자 시점으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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