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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첫 젠더·성범죄 전문 대법관 눈앞…오경미 후보 열쇳말은 ‘젠더’

등록 2021-08-16 16:24수정 2021-08-17 02:44

젠더법연구회·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 활동
‘성인지 감수성’ 강조해온 법원 변화 가속화 기대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2019년 12월 서울서부지법. 법원 젠더법연구회 소속 판사 20여명이 성범죄 피해지원 활동가 ‘마녀’(활동명)를 만났다. 마녀는 성폭력 피해 당사자이면서 다른 성범죄 사건 재판 방청 등을 통해 피해자와 연대하는 활동가다. 마녀는 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거나 소외됐던 성범죄 피해자 64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젠더법연구회에 전달했다.

이날 만남을 정리한 자료는 ‘법정 밖에서 성폭력 피해 생존자와 판사들이 만난 최초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려졌다. 법원 안팎에서 적잖은 파장을 낳았다. 지난 11일 대법관 후보로 임명 제청된 오경미(52·사법연수원 25기) 광주고법 전주재판부 고법판사는 마녀를 만난 판사 20여명 중 한 명이었다.

오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대법관에 임명되면 대법관 13명 중 여성 대법관은 박정화, 민유숙, 노정희 대법관 등 4명이 된다. 법조계와 여성계에서는 단순히 여성 대법관이 한 명 더 늘어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다. 젠더 이슈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 오 후보자 이력에 비춰볼 때 ‘성인지 감수성’을 수용한 판결을 잇달아 내놓고 있는 사법부 변화의 방향과 폭을 한층 다채롭게 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과거 성범죄 재판 비판적 재검토

오 후보자는 법원 젠더법연구회 소모임인 ‘인터뷰단’, ‘재판다시돌아보기팀(재돌팀)’에서 활동해왔다. 재돌팀은 2019년 레깅스 차림 여성을 불법촬영한 사건 재판부가 판결문에 피해자 사진을 실은 일이 <한겨레> 보도로 알려진 걸 계기로 만들어진 소모임이다. 각각 20여명의 판사가 참여하고 있는 인터뷰단과 재돌팀은 지난 2년간 성폭력 피해자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 활동가들을 직접 인터뷰하는 등 성범죄 재판 절차 개선을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판사들이 과거 재판을 경험했던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의견을 듣고, 심리 과정을 비판적으로 되짚어본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파격이었다. 오 후보자는 이러한 활동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여했던 고참 판사 중 한 명이었다.

특히 지난해 9월 열린 ‘성범죄 재판, 함께 돌아보기’ 포럼은 재돌팀 활동의 분기점이 됐다. 재돌팀 주최로 열린 이 포럼에 일선 판사와 검사, 시민단체 활동가 등 370여명이 온·오프라인으로 모였다. 재돌팀 소속 법관들이 성범죄 피해자·활동가 등을 두루 만나며 벼려온 문제의식을 종합하는 자리였다. 오 후보자는 ‘보호법익 관점에서 바라본 성범죄 재판’을 주제로 한 포럼 사회자로 나섰다.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다움’을 의심하고 강요하는 일로 이어질 위험성 등이 논의됐다고 한다.

이 포럼은 지난 5월 ‘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젠더법연구회 소모임만으로는 디지털 성착취 등 진화하는 성범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에 한계가 있다고 본 판사들이 새로운 연구회를 꾸린 것이다. 오 후보자는 연구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재돌팀 소속 한 판사는 “오 후보자 정도 되는 기수의 고참 판사가 이런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건 드문 일이다.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연구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며 각종 보고서를 감수하는 등 후배 판사들을 뒤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대법원 성인지 감수성 판례 넓힐까

대법원은 2018년 4월 학생 성추행을 이유로 해임된 교수가 해임 처분에 불복해 낸 행정소송(2017두 74702)에서 처음으로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했다. 당시 대법원은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을 심리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피해자들이 진술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교수의 손을 들어준 원심 판결은 잘못됐다고 판단했다. 피해자들이 2차 피해 우려로 소극적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후 성인지 감수성은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 중요한 판단 기준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같은해 10월 대법원은 피해자 행동이 강간을 당한 직후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며 ‘피해자다움’을 판단 기준으로 삼은 원심 판결을 깨는 판단을 다시 내놓는다. 대법원은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및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런 대법원 변화 흐름은 2019년 9월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 유죄 판단의 밑거름이 됐다.

오 후보자 임명 제청은 백래시(성평등에 대한 반발성 공격) 등 젠더 이슈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현안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엘리트 남성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대법원이 변화를 모색하며 내놓은 나름의 응답일 수 있다. 성범죄 피해자를 주로 대리해온 한 변호사는 “미투 운동과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뜨거웠던 지난 3년 동안 법원의 가장 직접적인 변화는 판사들이 판결문에 성인지 감수성을 고민하고 언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변화의 시작이 2018년 4월의 대법원 판례라는 점에서, 여전히 법원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디지털 성범죄와 젠더 이슈에 밝은 대법관이 새로 채워진다면 그 자체로 적지 않은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말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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