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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손발톱만 길어도 안절부절…결벽증, 몸에 새긴 학대의 기억

등록 2021-07-03 14:03수정 2021-07-03 14:06

[토요판]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
⑧ 트라우마와 결벽증

아동학대 상처 남은 30대 철영씨
엄격하고 술버릇 나빴던 아버지
성인 돼서도 트라우마 안 사라져
공포의 재경험과 일반화 겪게 돼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통계청이 올해 3월에 발간한 ‘국민 삶의 질 2020’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아동학대 사례 건수는 3만45건으로 2014년의 1만27건에 비해서 5년 사이 그 수치가 3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아동학대에 대한 경각심이 늘어나면서 신고 건수가 늘어난 것도 원인이 되지만 발생 자체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정인이 사건’처럼 아동이 사망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사례들이 언론에 연이어 보도되는데, 아동학대를 하면서도 자신이 엄격하게 훈육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부모의 친권이 강하기 때문에 개입을 거부하면 주위에서 도움을 주기 어렵습니다. 어릴 때 경험한 아동학대의 트라우마는 성인기까지 계속됩니다.

철영씨는 30대 남성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즐겁게 웃고 행복하게 지내는데 자신만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공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직장도 지난 5년간 세번이나 옮겼습니다. 회사에 들어가면 상사와의 관계가 항상 어려웠습니다. 어쩌다 상사를 마주치면 자신도 모르게 눈치를 보았고, 상사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닌지 항상 걱정했습니다. 그러다가 상사에게 지적받거나 상사가 자신에게 화를 내면 바로 직장을 그만둬버렸습니다. 이따금 철영씨는 갑작스럽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치솟아 주체할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내곤 했습니다.

윗사람과 관계 어려워 이직 잦고
‘샤워 1시간’ 결벽증과 정리벽도
정신과 상담서 쌓였던 감정 해소
이후 동호회·직장서 따뜻함 느껴

아동학대 기억이 결벽증으로

철영씨는 원룸에 혼자 사는데, 남들은 모르는 철영씨만의 습관이 있습니다. 집 안의 모든 물건이 일정하게 놓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발장의 모든 신발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어야 하는데, 신발의 앞축이 정면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식탁에 각 티슈를 놓을 때도 식탁의 가장자리 선과 티슈 상자가 평행을 이루어야 합니다. 식사를 할 때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평행이어야 식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샤워를 할 때도 몸에 비누가 남아 있을까 봐 보통 1시간 정도 샤워를 하게 됩니다. 철영씨는 직장을 마치고 집에 오면 정리정돈을 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합니다. 자신도 쓸데없는 에너지 소비라는 것을 알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철영씨가 무척 힘들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날카로운 물체를 보는 것입니다. 철영씨의 집에 있는 칼이나 가위는 끝이 뭉툭하게 잘려 있습니다. 손톱과 발톱도 조금이라도 길면 짧게 자르는 습관이 있습니다. 철영씨는 이따금 날카로운 물체를 보면 눈이 찔리지 않을까 이유 없이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철영씨도 불필요한 행동들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잘 없어지지 않습니다.

철영씨는 무척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두살 터울인 남동생과 함께 자랐습니다. 철영씨와 남동생은 아버지가 가진 신념에 따라 법조인이 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법조인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혹독하게 교육을 시켰습니다. 시험을 보면 틀린 개수대로 철영씨와 동생의 종아리를 때리곤 했습니다. 철영씨의 어머니는 술만 마시면 집 안의 물건을 부수고 화를 내는 남편 때문에 항상 불안했습니다. 항상 두 아들에게 아버지 말씀 잘 듣고 문제가 없게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남동생은 열심히 공부해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했지만 철영씨는 항상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시험을 잘 본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집에 왔는데 마침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철영씨보다 시험을 더 잘 본 것이었습니다. 그날도 철영씨는 아버지에게 칭찬을 듣기는커녕 틀린 개수만큼 종아리를 맞아야 했습니다. 철영씨는 터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펑펑 울었습니다. 그날 이후 자신이 어떻게 해야 이런 지옥 같은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부모에게서 독립해 자취를 했고, 아버지의 목표와는 전혀 다르게 평범한 직장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트라우마’란 실제로 죽을 뻔한 경험을 하거나, 심각한 질병에 걸리거나, 신체적·물리적으로 자신이나 타인에게 위협이 되는 사건을 겪거나 목격한 후 겪는 심리적 외상을 말합니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일반적인 트라우마(general trauma), 신체적 학대(physical abuse), 성적 학대(sexual abuse), 방임과 정서적 학대(neglect and emotional abuse)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그 사람의 예민성이나 공격성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우울증이나 불안증, 공황장애 등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철영씨는 어린 시절에 신체적 학대와 정서적 학대를 경험했습니다. 학대의 경험은 ‘재경험’과 ‘공포의 일반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재경험은 과거 혹은 어린 시절의 부정적 경험, 정서, 갈등 상태의 감정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무의식중에 떠올리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윗사람과 만나게 되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재경험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사람은 쉽게 넘길 수 있는 일도 자신을 비난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고 분노가 증폭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공포의 일반화는 과거에 경험한 트라우마 때문에 현재의 일상적인 경험, 사건, 대인관계까지도 더 위험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위협 반응이 더 쉽게 일어납니다. 어린 시절에 위험한 물건을 보면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던 마음이 날카로운 물건을 보면 다시 되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통제력을 잃을 때를 대비해 날카로운 물건의 끝을 일부러 자르게 되었습니다.

철영씨는 자신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결벽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어지럽혀 놓아서 평형이 깨어지면 심한 분노가 일어납니다. 동료들은 철영씨를 별것 아닌 것에도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자신이 현재 경험하는 것들이 과거와 연결된 기억을 불러오게 됩니다. 철영씨의 아버지는 알코올의존증으로 인한 간경화로 고생하다가 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철영씨의 만성적인 우울감과 불안감은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트라우마 극복 위해 먼저 나서는 용기

철영씨는 심한 공허감과 우울증으로 인근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찾았습니다. 그는 담당 선생님과 꾸준히 상담을 진행했습니다. 어느 날 철영씨는 선생님과 상담을 하는 도중 이유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왜 나한테 그랬는지, 아직도 나는 용서가 안 돼요.” 그는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흘렸지만 사실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아버지와의 관계가 담당 의사를 향한 정서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을 ‘전이’라고 합니다. 전이를 통해서 그는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고 담당 선생님을 “좋은 아버지”로 여기게 되면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과 부모와의 관계는 평생에 걸쳐 예민성을 줄이는 데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그런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뇌는 현재의 좋은 기억을 통해 과거를 극복하는 새로운 신경망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 그리고 편안하게 느끼는 일을 찾는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만약 자신의 직업이나 배우자, 이성 친구, 좋아하는 책, 아니면 상담하는 의사가 이와 같은 편안함을 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됩니다.

철영씨는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는 것 외에도 새로운 시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직장에서 독서 동호회에 가입해 동료들과 함께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며 즐겁고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직장에서는 자신보다 직급이 높고 어려운 상사도 함께 책 이야기를 나누며 상사와의 관계가 전보다 한층 편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동호회에서 만난 이성과 친해져 이제는 주말에 해야 할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물건이 조금 흐트러져도, 똑바로 놓이지 않아도 견딜 수 있고 개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철영씨는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철영씨가 느꼈던 공허감은 자신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면서 느꼈던 무력감이 다시 재경험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따뜻하고 자신을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만, 직장에서 일할 때 그런 느낌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일을 마치고 독서를 함께 할 때, 함께 커피 한잔을 하면서 이야기 나눌 때 과거를 극복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고, 새롭게 마음이 채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철영씨는 새로 들어온 신입 사원에게 자신이 먼저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도움을 주면서 처음으로 무척 행복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 정신과 교수 조지 베일런트는 1938년에 시작해 서로 다른 집단에 속해 있는 총 814명의 사람들을 평생에 걸쳐 추적 관찰했습니다. 하버드 법대 졸업생 집단, 지능이 뛰어난 여성 집단, 대도시 출신 고등학교 중퇴자가 그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스트레스 정도는 행복한 삶에서 중요 변수가 아니었습니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상황을 긍정적인 태도로 넘기는 사람이 결국 더 행복했다는 게 이 연구의 결론입니다. 이 연구에서 앤서니 피렐리라는 인물의 사례는 주목할 만합니다. 1941년 연구원이 처음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난방도 잘 안 되는 보스턴의 초라한 집에서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와 무력한 어머니와 함께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57년 뒤인 1998년에는 보스턴 공원이 보이는 좋은 집에서 사는 대사업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피렐리는 정서적으로 안정된 상태이고 가족들의 감정을 존중할 줄 아는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가 지은 ‘평온의 기도’를 성실하게 한 덕분에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고 용기와 인내심을 지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이시여,
저에게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의 지은이 전홍진 성균관의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예민한 사람과 둔감한 사람에 관해 설명합니다. 매우 예민하다는 것은 ‘외부 자극의 미묘한 차이를 인식하고 자극적인 환경에 쉽게 압도당하는 민감한 신경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모두 가명을 썼습니다. 자세한 것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이 글로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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