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우리말 쓰기】
연재ㅣ3회 공익광고 속 우리말
광고를 보다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을 때인데, 예를 들면 이런 광고다.
“빠르게 변하는 초시대
규제에 막혀 있는 신기술을 규제 샌드박스가 해결합니다.
규제 샌드박스
규제의 불편 없이 과감한 도전이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가 만드는 혁신의 길에 대한민국의 가능성이 오갑니다.
미래를 여는 가장 빠른 길, 규제 샌드박스가 함께합니다.” -대한민국 정부, 2020.
‘초시대’라는 말은 한 이동통신 서비스 업체가 만들어 작년부터 광고에 쓰기 시작했다.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새로운 시대를 ‘초시대’라고 하기로 했다고 광고에서 밝혔으며, 2년째 그 회사의 광고는 “초시대, 생활이 되다”로 마무리된다.
초시대? 1분 1초를 다툴 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라는 뜻인가 했더니, 업체에서 밝힌 ‘초’(超)는 ‘뛰어넘는다, 훨씬 뛰어난, 매우’라는 뜻을 가진 한자말이다. 따라서 초시대란 말은 아주 대단한 시대라는 뜻이려니 생각해보지만, 썩 와닿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이 말을 일반 사람들이 널리 쓰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정부 광고에서 이 말이 나왔다. ‘규제 샌드박스’(규제 유예)라는 낯선 말과 함께.
샌드박스는 모래를 깔아놓은 놀이터이므로 아이들이 넘어져도 다칠까 걱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곳이다. 왜 이 샌드박스가 규제라는 말과 만나 ‘규제를 미룬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을까?
이 말은 2016년 영국에서 처음 만든 걸 그대로 가져와 쓴 것이다. 영국에서 새로운 금융 상품을 개발했는데, 기존의 금융 관련법과 규제에 부딪히는 면이 있자 상품을 빨리 시장에 내놓을 수 있도록 정부가 규제를 미룬다는 뜻으로 ‘규제 샌드박스’라는 개념을 만든 것이다.
개념이 낯설어서 그런지, 문장까지 매끄럽지 않다. “규제에 막혀 있는 신기술을 규제 샌드박스가 해결”한다고 하면 신기술이 골칫거리라는 뜻이 되니, 말이 안 되는 문장이다. ‘규제로 신기술이 겪는 어려움을 규제 샌드박스가 해결합니다’라고 해야 말이 된다.
“우리가 만드는 혁신의 길에 대한민국의 가능성이 오갑니다”라는 말도 이상하다. ‘혁신의 길 위로 가능성이 펼쳐집니다(열립니다)’ 정도가 자연스럽다.
이렇게 정부가 정책을 발표하며 쓰는 용어에 쓸데없이 영어가 많다. 올해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주관한 ‘대한민국 동행세일’은 중소기업과 중소상인들에게 큰 도움을 주며 성공한 행사로 알려졌다.
이 행사를 열기 전 중소벤처기업부에서 발표한 보도자료를 보면 “‘대한민국 동행세일’은 라이브 커머스, 언택트 콘서트, O2O 행사 연계 등 비대면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소비촉진 행사로 6개 권역에서의 현장행사와 온·오프라인 판촉, TV홈쇼핑 등 연계행사를 통해 소비심리를 진작하기 위해 개최된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겨우 한 문장인데, 상업 경제지 같은 곳에서나 쓸 법한 용어들이 줄줄이 나온다. ‘언택트 콘서트’는 ‘비대면 공연’으로, ‘O2O 행사 연계’는 ‘온오프라인 연계 행사’로, ‘라이브 커머스’는 ‘실시간 방송 판매’로 다듬어 쓰도록 국립국어원에서는 권장하고 있다. 라이브 커머스는 때에 따라 ‘생방송 장터’라 해도 좋겠다.
이 밖에도 ‘스타트업, 스케일업, 스마트업, 컴업’ 같은 말이 보도자료에 예사로 등장한다. 중소벤처기업부는 ‘디지털 경제로의 대전환, 스마트 대한민국’을 표어로 내걸고 있는데, 이 부처만이 아니라 현 정부의 핵심 국정정책 용어가 ‘스마트’와 ‘그린 뉴딜’이지 싶다. 수많은 인재가 일하고 있는 정부에서 핵심 국정정책을 알리는 말조차 마땅한 우리말을 못 찾아서 영어로 썼을 리 없다. 그저 정부가 우리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증명할 뿐이다.
‘스마트하다’는 어느새 외래어로 인정받아 국어사전에도 “몸가짐이 단정하고 맵시가 있다. 또는 모양이 말쑥하다”로 뜻풀이가 되어 있다. 지금 ‘스마트’는 그 이상의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으니 사전의 뜻풀이도 더 늘려야겠다. 이렇게 의미가 확장되는 데 정부도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으니…. 그 누구보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고 가꾸는 데 앞장서야 할 정부가 이렇게 우리말을 홀대해도 되는가.
신정숙 교열부 기자 bom1@hani.co.kr
감수 상명대학교 계당교양교육원(분원) 부교수 서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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