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경남 창녕에서 쇠줄에 묶인 채 학대당하던 아홉살 어린이가 집을 탈출한 사건이 있었다. 충남 천안에서 아버지의 동거녀가 아홉살 어린이를 가방에 가둬 숨지게 한 사건도 있었다. 잔인한 아동학대에 사람들은 ‘쯧쯧쯧’ 혀를 차지만 일상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흔히 하는 말 중에도 정서적 폭력을 담은 아동학대가 숨어 있다. 아이에게 말상처가 되는 100가지 언어를 쓰지 말자는 캠페인이 1년5개월째 계속되며 호평을 받고 있다.
“학원비 얼만데 수업 빼먹어” “안 씻으니까 아프지” “한 번만 더 하면 폰 뺏어버린다” “반찬 투정하면 밥 안 줄 거야” “큰소리를 꼭 쳐야 말을 듣니?”…(‘아이에게 상처 주는 말, 난 얼마나 하고 있을까’ 자가테스트 목록 중)
초중고생 삼남매를 기르고 있는 아버지 김현종(가명·46)씨는 최근 자신이 아이들에게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는지 자가테스트를 해보았다. 지난해 중학교 3학년이던 큰아들에게 자신이 썼던 말들을 떠올리며 체크하니, 말상처가 된다는 100가지 예시 중 61개를 사용했다는 걸 알았다. “(아이가) 말을 해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니까 말을 좀 세게 했죠.” 김씨는 큰애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최근 경남 창녕에서 쇠줄에 묶인 채 학대당하던 아홉살 아이가 베란다를 통해 탈출해 구조된 사건이 있었다. 충남 천안에서는 아버지의 동거녀가 아홉살 어린이를 가방에 가둬 숨지게 한 사건도 벌어졌다. 연이어 발생한 잔인한 아동학대 사건에 온 나라가 놀랐지만 반드시 때리고 감금해 죽음에 이르러야만 아동학대일까. 일상의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흔히 하는 말에도 언어·정서적 폭력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말로도 때리지 말라’는 캠페인이 1년5개월째 호평을 받고 있다. 국제구호개발 엔지오 세이브더칠드런이 지난해 2월부터 진행 중인 ‘그리다. 100가지 말상처’ 전시회가 지금까지 온오프라인 통합 누적관람객 210만명을 기록했다. 아이들에게 상처 주는 말 100가지를 아동심리 전문가와 함께 선정한 뒤 3~16살 아동 297명을 모집해 이 말을 들었을 때 느낀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했다. 그 그림들이 코로나19 이전 1년여간 국제어린이마라톤대회, 아동권리영화제, 부산 지하철 광안역, 전남 신안군청, 전북교육청, 서울 씨지브이(CGV) 영화관 등 전국 17개 도시에서 59회 전시됐다. 그림뿐만 아니라 말상처 언어들의 대체 언어를 제시하고 ‘바꿔 말하기’ 캠페인도 함께 벌이고 있다. 이 캠페인은 국제광고제에서 상을 휩쓸었다. 세이브더칠드런 관계자는 “성인끼리는 폭력적 언어를 쉽게 인지하면서도 아이한테는 그렇지 못하다. 훈육이라 생각하는 말들이 실은 언어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알리고 있다. 아동을 한 명의 인격체가 아닌 부모 소유물로 보는 시선을 바로잡고자 캠페인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2~3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그리다. 100가지 말상처’ 전시회. 세이브더칠드런 제공
지난해 2~3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그리다. 100가지 말상처’ 전시회. 세이브더칠드런 제공
성장기에 부모의 말이 중요한 이유
2018년 겨울 학부모 김진별(가명·38)씨의 자녀 둘은 이 캠페인의 작품을 그리는 데 참가했다. 당시 미술학원에 다니던 여섯살 아들과 다섯살 딸이 캠페인용 작품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한 것이다. 아들은 부모에게 “너는 왜 맨날 흘리고 먹니”란 말을 들었을 때의 감정을 그렸다.(그림1) 그림 속 아이는 미역국이 담긴 식판을 앞에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모습이었고, 아이 뒤 배경색은 온통 검정이었다. “넌 아직 어려서 못해”라는 말을 듣고 그림을 그린 딸은 파란 눈물을 흘리는 아이의 모습을 그렸다.(그림2)
어머니 김진별씨는 이 그림들을 보고 살짝 놀랐다. 김씨는 “‘골고루 먹으라’거나 ‘왜 흘리고 먹니’란 말은 아이 건강과 식습관을 위해 부엌에서 일상적으로 했던 표현인데, 무심결에 나온 말이 아이한테 상처가 됐음을 알았다”고 했다. 사남매를 키우고 있는 김씨는 어린 셋째와 넷째는 아기라고 생각해 보살펴줬다면, 첫째와 둘째에게는 다소 엄격하게 대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김씨는 “기준을 정해 놓고 아이가 잘못했을 때 제대로 훈육하는 것과 어른의 기분에 따라 말을 내뱉는 것은 다르다. 여덟살이 된 큰아이가 친구와 대화하는 걸 보면, 저의 좋고 나쁜 언어 습관을 모두 닮았다. 집 안에서 부부가 서로 존중하는 대화를 하는지, 어렸을 때 부모가 어떤 말을 하는지는 아이가 어른이 됐을 때의 모습을 좌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어린이는 성장기에 부모한테 들은 언어가 특히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성장기 아동은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에 대한 첫 이미지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진혜련 아동심리 전문가는 “성장기 아동을 사회적 기준에 맞춰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해 아이의 감정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부모가 거의 유일하다. 학교처럼 외부에서 맺는 관계는 사회가 원하는 기준에 맞춰 아이를 판단하므로 아이가 온전히 수용받기 힘들다. 그런데 부모에게까지 수용받지 못하면 아이는 ‘난 있는 그대로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란 이미지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어릴 때 긍정적 자아를 형성한 사람은 성인이 된 뒤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와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진 전문가와 세이브더칠드런은 국내 책 <아이의 자존감을 살려주는 결정적 한마디>(김주희), 외국의 저서, 외국 아동심리 누리집 등을 참고해 아동에게 말상처가 되는 부모의 100가지 언어를 선별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었다. 김진별씨가 아들에게 했던 말 “너는 왜 맨날 흘리고 먹니”는 “흘렸네, 닦아야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지금의 실수를 정확히 지적하는 대신 ‘맨날 흘리고 먹는 아이’로 단정하지 않는 것이다. 김씨가 딸에게 했던 “넌 아직 어려서 못해”는 “혼자 하기 어려우면 엄마(아빠)가 도와줄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아이는 스스로 성장과 자립 욕구가 있는데, 아직 어려서 못한다고 단정하는 말은 아이를 깎아내리는 말로 아이 자존감을 낮게 만들 수 있다고 전시회는 설명하고 있다. 아이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는 말의 유형 세가지를 뽑아 봤다.
① 대체어가 없는, 해서는 안 되는 말
아예 대안 제시가 불가능한, 일상에서 해서는 안 될 말도 있다. “너 때문에 못 살겠다” “널 왜 낳았는지 모르겠다” “넌 대체 누굴 닮아서 이러니?” “너 커서 뭐가 되려고 이래” “공부도 못하는 게” “지 아빠(엄마)랑 똑같아” “공부 안 하면 저 사람처럼 된다” “잘났어, 정말” “사내자식이 약해 빠져 가지고”…. 전문가들은 “이 말은 아이에게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간곡하게 말했다.
해서는 안 될 말들은 대체로 △아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 △부부간에 서로를 깎아내리는 말 △다른 사회 구성원을 얕잡아보는 말 △비아냥대는 말 △성차별을 조장하는 말 등이다.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말을 들은 아이는 자존감이 낮아지며, 자신이 무의미한 존재라고 생각하거나, 언젠가 자신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아이가 자신이 소중하다고 느끼도록 표현해주어야 한다.
②비교와 경쟁 유발은 대체로 안 좋은 말
100가지 말상처 목록에는 “너 바보야? 이것도 몰라?” “넌 정말 구제불능이야”처럼 누가 봐도 말상처 언어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 자녀를 기르는 연령대의 어른들이 어렸을 적 많이 들었을 법한 언어들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네 형(누나) 반만이라도 따라가 봐”(그림3) “걔는 학원도 안 다니고 1등 했다더라” “절대 남한테 지면 안 돼” “가영이는 몇 점 맞았어?” “왜 맨날 그런 친구들이랑 어울리니?” “그 친구네 부자니? 잘살아?” 같은 말이다.
형제나 자매, 친구와 비교하는 말은 부모가 학업 성취를 위해 아이를 재촉할 때, 자녀가 경쟁에서 살아남는 강한 아이로 키우고자 할 때 많이 쓰는 언어다. 하지만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아동은 가정 밖에서 필연적으로 비교와 경쟁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데, 가정에서 자신을 낳은 부모조차 아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공부 잘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식의 조건부 언어 습관을 보인다면 아이는 긍정적 자아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 캠페인에 참여한 남궁인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지금의 어른들은 어린 시절 비교와 경쟁을 부추기는 말을 너무나 일상적으로 듣고 자랐다. 이 말이 문제 있는 언어인지 깨닫지 못한 채 그대로 아이들한테 사용하고 있는데, 지금이라도 자정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언어환경에서 아이들이 자라나고, 그들이 커서 새로운 언어문화를 만든다”고 말했다.
③ “칭찬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악영향
“넌 우리 집 기둥이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자신이 집 안에 혼자 있는데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쳐 집이 갈라지는 그림을 그렸다. 아이가 자신의 행동에 부담을 느끼고 뭔가 특별한 성취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낄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너를 사랑하고 응원한다”는 문장으로 바꿔 말하면 좋다. “난 너 하나 보고 살아.” 부모의 기대를 과도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면, 아이를 양쪽에서 감싸 안은 부모는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 안에 갇힌 아이는 검보랏빛의 질린 표정을 짓고 있다. 부모 뒤 바탕색은 검은색으로 부정적 기운을 내뿜고 있다.(그림4) 아이가 부모에 대한 부담으로 긴장감과 불안감에 휩싸일 수 있다. “넌 엄마, 아빠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야”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넌 잘 참잖아.”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유리병에 갇혀버린 자신을 그렸다.(그림5) 이 말이 아이의 참는 행위를 강화해 자신의 불편한 상태를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로 자라게 할 수 있다. “괜찮아, 힘들면 말해도 돼”라고 바꿔 말하면 어떨까.
말로도 얼마든지 때릴 수 있다
전시회 ‘그리다. 100가지 말상처’를 본 부모들은 간혹 의문을 갖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어떻게 상처 주는 말을 아예 안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진혜련 아동심리 전문가는 “어떤 말을 했는지 매일 체크해야 한다면 부모가 스트레스를 받는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아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지 먼저 생각하면서 아이를 존중하고 공감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부모가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위해 아이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참으면 언젠가 폭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기계적으로 수칙을 따르려 하기보다는, 아이와 좋은 관계를 형성하려다 보면 말도 자연스레 긍정적 표현으로 대체된다는 조언이다.
또한 이미 아이에게 상처 주는 말을 너무 많이 해온 것 같다고 고민하는 부모도 있다. 진 전문가는 “관계는 변할 수 있다. 친구와 사이가 좋지 않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좋아질 수 있듯 상처 주는 말을 안 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아이에게 ‘다시 너랑 잘 지내보고 싶어’라는 신호가 된다”고 설명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