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전시실 안의 유물 안내문은 모든 사람의 눈높이에 맞춘 공공언어가 돼야 한다. 철기시대 민무늬토기를 우리말로 쉽게 설명하는 안내문이 쓰인 국립춘천박물관 중도식토기 전시관 신정숙 기자
강원도 춘천에 있는 국립춘천박물관 1층 중앙문을 열고 들어서니, 실내인데도 눈앞이 훤해지는 게 방문객을 반갑게 맞는 듯하다. 건물의 천장 전체가 둥근 천창 형태라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카페와 쉼터는 3층까지 이어져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이 기분 좋은 박물관에도 여느 박물관처럼 1층에 선사시대와 고대의 유물 전시관이 있는데, 남다름이 느껴진다. 선사실에 들어가니 ‘뗀석기’ ‘찍개’ ‘주먹도끼’ ‘누름무늬토기’ ‘두드림무늬토기’ ‘돌무지무덤’ 이런 낱말들로 유물을 설명해놓았다. 예전에 역사시간에 들었던 ‘타제석기’ ‘무문토기’ 같은 말이 떠오르며, 역사학계에서 벌이는 ‘우리말로 기록하는 우리 역사’ 운동의 성과를 느낀다.
“밀개는 경사진 날을 갖고 있어 가죽 안쪽의 기름 제거에, 긁개나 칼은 날이 날카로운 편이라 고기를 저미거나 잘라내는 데 적합합니다.”
밀개는 미는 데 쓰는 것이고, 긁개는 긁어내는 데 쓰는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으니 참 좋다. 그리고 ‘저미다’라는 말에 마음이 머문다. 텔레비전이나 그 밖의 온갖 영상 매체에서 ‘먹방’이라는 것을 많이 보여주는데, 거기에서 재료를 얇게 베어내는 것을 ‘저민다’고 하지 않고 ‘슬라이스한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저민다는 말은 의미가 확대되어 “칼로 도려내듯이 쓰리고 아프게 한다”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한겨울 칼바람이 뺨을 저미는 듯하다”라는 표현도 있고, “가슴을 저미는 이야기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같은 표현도 나온다. ‘슬라이스’로는 그 느낌을 전달할 수 없는 표현이다. 저민다보다 슬라이스가 더 많이 쓰여 저민다가 점점 밀려나는 듯 느껴지는 것이 내 쓸데없는 걱정이면 좋겠다.
또 먹방에서 많이 쓰는 말 중 ‘투하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고기에 소금이나 후추를 뿌리는 것도 “소금 투하, 후추 투하”라 하고, 참기름을 살짝 치는 것도 “참기름 투하” 숭숭 썬 감자를 냄비에 넣는 것도 “감자 투하”라 하니… 음식 만드는 데 ‘투하’가 이렇게 많이 쓰일 말인가 싶다.
박물관 2층 정보·휴게 코너에는 춘천박물관뿐만 아니라 강원도 곳곳의 박물관 안내지가 꽂혀 있다. 그중 ‘양구백자박물관’ 안내지를 읽다 보니 ‘양구백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양구의 백토는 조선시대 분원백자 제작 원료의 주원료였다. 양구백토는 불순물이 약간 함유된 백운모계 고령토질 도석으로, 철분 함유량이 0.1~0.5%로 백색도가 높은 태토이며, 입도가 대체적으로 미립의 균질한 원료로 볼 수 있다. … 양구지역에서 연간 채굴된 백토의 양은 500~550石으로 약 72~79.2톤에 달하며, 이를 채굴하기 위해 양구의 民戶 500호가 동원되었다. 채굴된 백토에서 정토(正土)를 선별하고 운송하는 역사(役事)는 춘천·홍천·인제·낭천(현 화천) 지역에서 담당하게 된다. 양구지역도 처음에는 운송에 가담하였으나 1710년 어느 시점에서 제외된다. 채굴된 백토의 분원 운송은 주로 수운(水運)을 이용해 봄과 가을 두 번 운송되었다. 하지만 제때에 납입하지 못하였거나 가뭄이 지속되어 수운이 어려울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육로(陸路)로도 운송되었다.”
학술 논문에서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공공기관에서 펴낸 안내지가 맞나 싶은 글이다. 이런 글을 읽으니 양구백자박물관까지 고리타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다듬어보았다.
박물관 전시실 안의 유물 안내문은 모든 사람의 눈높이에 맞춘 공공언어가 돼야 한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도구와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전시관. 국립춘천박물관 제공
→ 양구의 백토(흰흙)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는 사기그릇의 주원료였다. 불순물이 조금 섞인 백운모계 고령토질 흙으로, 철분이 0.1~0.5%밖에 안 되는 새하얀 바탕흙(도자기의 밑감이 되는 흙)이며 알갱이가 아주 가늘고 고운 흙이다. … 양구에서 한 해 동안 캐낸 백토의 양은 약 72~79.2톤쯤 되었고, 양구의 민가 500집을 동원해 캐냈다. 캐낸 백토에서 순수한 흙을 골라내고 옮기는 일은 춘천·홍천·인제·낭천(현 화천)에서 맡았다. 양구도 처음에는 옮기는 일을 함께 했으나 1710년 어느 때부터 제외된다. 백토는 배에 실어 봄과 가을에 두 번 분원(관에서 운영한 사기 공장)으로 보냈다. 다만 제때 못 보냈거나 가뭄 탓에 배로 나르기 어려울 때는 어쩔 수 없이 뭍으로 날랐다.
‘전시실 안의 유물 안내문’은 이해하기 쉽게 쓰여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눈높이를 맞춘 친절한 공공언어라면, ‘전시실 밖의 박물관 안내지’는 몇몇 사람에게만 눈높이를 맞춘 불친절한 공공언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같은 공간 다른 시간인 듯, 한쪽에 현재의 언어가 쓰였다면 다른 한쪽에는 과거의 언어가 쓰였다고나 할까.
신정숙 교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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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 상명대학교 국어문화원 특임교수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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