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6일 일요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교육공동체 ‘나다’에서 인문·철학 강의 ‘역사 속의 재판들 파트1: 법은 누구의 편일까?’가 열렸다. 강의가 끝난 뒤 청소년들과 ‘나다’ 활동가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있다. 김지윤 기자
지난 6일 일요일 오후 3시. 서울 마포구에 있는 ‘교육공동체 나다’(이하 나다)를 찾았다. 일요일 오후, 가장 놀고 싶고 자고 싶은 시간대에 십대들이 모여 앉아 인문·철학 공부를 하고 있다기에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 20년째 청소년 철학교실 열어
나다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학생 10명이 둘러앉아 임성민 활동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이들 옆에 앉아 인쇄물을 슬쩍 봤다. ‘역사 속의 재판들 파트 1: 법은 누구의 편일까?’ ‘약자의 시선으로 다시 보는 역사적 순간들’ 등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오전에는 주말 초등부 인문·철학 강의인 ‘휴머니잼―고민하는 자람이: 외모지상주의에 관하여’를 진행했다고 나다의 터줏대감인 변중용 활동가가 말했다. 나다(nada.jinbo.net)는 2000년 청소년을 위한 철학교실로 시작해 20년째 청소년 대상 인문·철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비영리 시민단체로 회원들의 후원을 받아 운영된다. 수업 교재를 자체 개발하기도 하고, 약자의 시선으로 본 역사 만화 <피터 히스토리아>는 2012년 부천만화대상을 받기도 했다. 인문·철학적으로 질문하는 역사 만화로 꼽혔기 때문이다.
■ ‘세상’이라는 책을 읽어보자
“질문이 살아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아동·청소년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중하며, 인문·철학 공부가 중요한 이유는 언젠가 약자의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다의 정열음·하나래 활동가가 말했다. 정열음 활동가는 2013년부터 지금까지 인천 강화 지역에서 ‘책 읽어주는 언니’로도 활동하고 있다. 학교에 갓 입학한 8살 학생들도 인문학 공부가 가능하다는 걸 시간으로 증명해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함께 인문학 공부를 시작한 아이들이 어느덧 교복 입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이 됐다. 정 활동가는 “동화를 읽어주며 인문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동화는 함축과 상징의 과정으로 만들어진다.
어린 시절 함께 책을 읽는 경험을 하면서 아이들 스스로 질문하고 그 질문을 마음속 뿌리 삼아 자신만의 철학 토대를 다져온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인문학과 철학은 어렵거나 추상적인 무언가가 아닙니다. 어른과 아이가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 나와 상대방이 서로를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지 자각하는 것 등이 모두 인문·철학 공부지요.”
10월6일 일요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교육공동체 ‘나다’에서 인문·철학 강의 ‘역사 속의 재판들 파트1: 법은 누구의 편일까?’가 열렸다. 김지윤 기자
■ 몸만 자라는 아이로 남지 않으려면
“너는 너무 생각이 많아. 뭐가 그렇게 맨날 궁금하니?”
주변에 호기심 많은 학생들에게 부모 세대가 주로 하는 말이다. 생각이 많은 학생은 또래 사이에서 별종으로 통하기도 한다. 한데 철학교육 전문가들은 “십대 시절만큼 인생에 관한 질문과 고민이 많아지는 시기가 없다”고 강조한다.
<나는 이 질문이 불편하다> <열일곱 살의 욕망 연습> 등을 펴낸 철학박사 안광복 교사는 철학이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에 관해 미술관을 예로 든다.
일상 속에도 아름다운 것들이 있지만, 미술관에 가면 새롭고 뜻깊은 작품을 보게 된다. 안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철학도 마찬가지라서 참신한 것을 많이 보고 깊게 보는 훈련을 해보면, 상대적으로 ‘숙제를 미룰까 말까’ ‘학원에 갈까 말까’ 등 일상 속 사소한 문제들이 쉽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인문·철학 공부는 아이들에게 세상을 다르게 보는 용기를 준다. 그 용기를 벗삼아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가면서도 내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인문·철학 공부는 ‘이성과 감성의 근력’을 키워주는 체조 같은 것이다.
■ 인문·철학적 사고를 기르려면
20년째 나다에서 인문·철학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변중용 활동가는 인문·철학적 사고를 키우기 위해 먼저 ‘논리적인 사고를 연습할 것’을 권한다.
어떤 사안에 관해 ‘왜 그렇지, 근거가 뭐지, 그 근거가 합리적인가’ 등을 시간을 들여 생각해보는 것이다. 초등 저학년이라면 ‘암기’도 하나의 방법이다.
서양에서는 청소년들에게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외우도록 하기도 한다. 마치 목소리로 필사하듯, 철학자의 논리 대화법을 외워보면서 사유를 따라가보는 것이다.
변 활동가는 “개인적으로는 문학책을 많이 접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문학은 철학의 본질적 고민을 이야기로 알기 쉽게 풀어내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소설을 읽으며 작품 속 갈등 상황과 마주해보고, 스스로 생각해보며 질문을 만들어보는 등의 활동이 모두 인문·철학 공부라는 이야기다. “제도권 교육에서 금지와 통제로 ‘질문을 자체 검열하는 아이들’을 만들어내지만, 인문·철학 교육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갖춘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10월6일 일요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교육공동체 ‘나다’에서 인문·철학 강의 ‘역사 속의 재판들 파트1: 법은 누구의 편일까?’가 열렸다. 강의가 끝난 뒤 청소년들과 ‘나다’ 활동가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있다. 김지윤 기자
■ 카프카의 <변신>을 읽는 법
바퀴벌레에게 바퀴벌레라고 부른다고 기분이 나빠지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바퀴벌레는 자기가 ‘바퀴벌레’인 줄도 모르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한데 한 사람을 ‘바퀴벌레 같은 놈’이라고 부를 경우 복잡한 상황에 접어든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시작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아침에 눈을 뜨자 끔찍한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때 바퀴벌레가 은유인지, 특별한 의미를 가진 소설 속 장치인지 등을 따져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문·철학적 사고를 하는 청소년이라면 “작가는 왜 주인공을 끔찍한 벌레로 변신시켰을까?”를 떠올릴 수 있다.
변 활동가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 ‘벌레’의 은유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철학, 역사, 사회를 망라한 거대한 의미가 된다”며 “더 나아가 벌레의 의미를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으로 확장시키는 상상력도 발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문·철학 공부를 ‘나 자신을 지키는 컨트롤타워’라 생각하고 접해보면 좋겠습니다. 특히 어린이·청소년 시기에 철학을 접하지 않으면 20대, 30대, 50대가 되어도 자기 자신이 불안하고 힘들 거예요. 몸에도 ‘코어 근육’이 필요하듯 인문·철학 공부가 우리 삶의 방식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입니다.”
10월6일 일요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교육공동체 ‘나다’에서 인문·철학 강의 ‘역사 속의 재판들 파트1: 법은 누구의 편일까?’가 열렸다. 강의가 끝난 뒤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있다. 김지윤 기자
■ 아이 질문에 자리 피하지 마세요
아이들의 인문·철학 교육의 중요성은 교사들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1968년 서울교육대학교 철학연구회 회원들이, 재학생 때부터 교사가 된 뒤에도 꾸준히 모여 공부하던 중에 1986년 ‘어린이 철학교육 연구소’를 만들었다. 인문·철학 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교사들이 ‘판’을 마련한 것이다.
박민규 연구소장은 “철학은 어린이의 생각을 춤추게 한다. 아이가 부모에게 질문을 해온다는 것은 일종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아이의 질문을 통해 관심사와 사고 방향을 가늠할 수 있고, 소통의 시간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들이 인문·철학에 대해 잘 모르겠으면 ‘확실하지는 않지만~’이라고 말문을 열면 됩니다. 정답을 모른다고 자리를 피하지 마시고요. 그러면서 아이와 함께 문답을 나눠보는 것이죠. 그게 가장 쉬운 인문·철학 교육입니다.”
글·사진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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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인문학을 아이들 생활 속에 녹여냈어요”
어린이·청소년 인문·철학 추천 도서
‘인문’(人文)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인류의 문화’ ‘인물과 문물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인륜의 질서’라고 돼 있다. 사람을 이해하고, 학교나 사회 속에서 맺은 관계를 살필 줄 알고, 뉴스를 보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어린이·청소년들이 인문학과 철학을 조금 더 쉽게 접하는 방법은 역시 직접 읽어보는 것이다. 소설로 읽는 철학책인 <소피의 세계>(현암사)뿐만 아니라 책을 본 뒤 활동해볼 수 있는 워크북이 들어 있는 시리즈도 많다. 어린이·청소년 시기에 읽어보면 좋을 인문·철학 도서를 추천한다.
<내일을 위한 책 세트>(풀빛)
2016년 볼로냐 라가치상 논픽션 대상을 받은 시리즈다. <내일을 위한 책 세트>(워크북 포함) 저자 중 한 명인 최은경씨는 현직 초등 교사다. 경기도교육청 인정 교과서인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을 만들었고, 초등 국어 교과서 집필위원 등을 맡고 있다. 이 책은 1권부터 4권까지 나뉘어 있는데, ‘독재란 이런 거예요’ ‘사회 계급이 뭐예요?’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룰까요?’ ‘여자와 남자는 같아요’와 워크북으로 구성돼 있다.
이 책은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한 뒤 그 시기에 독재, 사회 계급, 민주주의, 성평등이라는 사회·정치적으로 중요한 주제를 어린이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출판됐다. 쉽지만 명확하게 민주주의와 인문학의 가치를 전달하고, 미래 세대가 만들어가야 할 내일의 사회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도록 이끌기 위해 이 시리즈를 기획·집필했다고 한다.
<나의 첫 젠더 수업>(창비)
인문학의 기본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린이집 시절부터 ‘여자’ ‘남자’로 나뉘어 알게 모르게 서로에 대한 편견을 쌓아왔을 어린이·청소년과 학부모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나의 첫 젠더 수업>은 공부, 직업, 사랑, 다이어트, 모성 신화를 비롯해 최근의 여성 혐오 이슈까지 사회 구성원인 여자와 남자를 둘러싼 오래된 오해와 궁금증에 쉽고 명쾌하게 답하는 책이다. 2012년에 수학·과학 분야의 남녀 차이를 정식으로 부정했다는 뉴스, 가전제품 발전으로 가사노동이 오히려 더 늘어났다는 연구 결과, ‘낭만적 사랑’이라는 개념은 18세기에야 시작됐다는 역사적 사실 등 고전적인 이론은 물론 최신 청소년 연구와 통계까지 다양한 자료를 활용해 기존의 상식을 뒤집고 바로잡는다.
<철학하는 어린이 시리즈>(상수리)
<철학하는 어린이 시리즈>의 저자 오스카르 브르니피에는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노르웨이,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시리아, 알제리 등 대륙을 오가며 어린이들에게 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행복이 뭐예요?’ ‘함께 사는 게 뭐예요?’ ‘감정이란 무엇일까요?’ ‘나는 누구일까요?’ 등 부모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어렵고 추상적인 아이들의 질문을 어린이의 일상으로 끌어들여 생활 속에서 철학을 설명해준다.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