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0일 오후 경기 숙지고등학교에서 ‘논쟁이 살아있는 교실’ 공개 수업이 열렸다. 1학년 1반 학생들이 에이(A)팀과 비(B)팀으로 나뉘어 ‘3·1 운동 정신은 대한민국에서 실현되었나?’를 주제로 논쟁하고 있다. 김지윤 기자
“3·1운동의 정신은 평등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현재 한국에서 실현됐다고 본다. 헌법 제2장 제11조 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에서 명시하고 있다.” 찬성팀 정찬혁 학생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3·1운동의 정신은 자유와 평등인데 과연 이게 실현 됐는가? 최근 일본 불매운동 관련해 아무 잘못 없는 일본 여성이 길거리에서 폭행당한 사건이 있었다. 우리가 일본인 개인까지 싫어해야 하나? 초·중·고 교실에 있는 일본계 다문화학생의 마음은 요즘 어떨까? 3·1운동의 정신은 폭력이나 혐오, 그런 게 아니다.” 반대팀 유은수 학생
“네. 두 분의 의견 잘 들었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해줄 학생은 손을 들어주세요.” 진행팀 정수민·이현석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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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기획·연출하는 선생님
9월20일 금요일 오후 4시. 경기도 수원에 있는 숙지고등학교 1학년 1반 교실에서는 ‘논쟁이 살아있는 교실-한국사’ 수업이 한창이었다. 3~4명씩 모둠별로 앉은 학생들의 책상 위에는 잘 정리된 수업 자료와 과제가 놓여있었다. 수업 주제는 ‘3·1운동의 정신은 대한민국에서 실현됐다고 볼 수 있는가?’. 주제는 3·1운동의 정신이지만 아이들이 이 논쟁에서 3·1운동과 연계해 다루는 요소는 최근 뉴스부터 헌법, 신문기사, 논문 등 다양했다.
보통 수업 자료와는 달리 ‘기획·연출: 이동욱 역사교사’ ‘수업 진행·운영: 학생 진행팀 및 토론팀’이라는 말이 적혀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교사가 수업을 기획·연출하는 피디(PD) 역할을 맡고, 학생들이 교실 안에서 논쟁을 진행하며 수업을 한다니. ‘토론이 아닌 논쟁 수업이라면 혹시나 아이들끼리 싸움이 나지는 않을까’라는 괜한 우려와 함께 수업을 참관했다. 이런 방식의 논쟁 수업은 1년에 100차례 정도 진행한다.
이동욱 교사의 자리는 교실 중앙 교단이 아니었다. 이 교사는 교실 옆쪽 벽에 붙어 앉아 노트북을 열고 학생들의 ‘수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수업의 기획·연출자인 이 교사는 학생들이 의견을 내는 중간 중간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코멘트를 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도움말을 줄 때는 학생들 의견을 나무라지 않고 “새로운 관점이다. 영감을 줘서 고맙다”며 논쟁을 측면에서 이끌어갔다.
지난 9월20일 오후 경기 숙지고등학교에서 ’논쟁이 살아있는 교실’ 공개 수업이 열렸다. 1학년 1반 학생들이 본격적인 논쟁 전 모둠별 토론을 하고 있다.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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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과 논쟁 수업, 다른 점은?
토론 수업은 많이 접해본 개념이라 익숙하지만, ‘논쟁형 수업’이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낯설다. 교실에서 ‘사회현안 논쟁형 수업’(이하 논쟁 수업)을 진행하는 박경록 서울 가재울고등학교 역사교사는 “논쟁 수업이라는 말을 처음 접하면, 대부분 ‘토론 수업’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논쟁 수업은 토론 수업과는 사뭇 다른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토론이 하나의 수업 방법이라면, 논쟁 수업은 학습 내용이 지향하는 바와 관련이 깊다. 논쟁 수업은 논쟁적 발문을 통해 역사가 가진 본성 중 하나인 논쟁성을 살리는 게 핵심이다. 학생들이 다양한 역사 해석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교실에서 ‘판을 벌려주는 것’이 논쟁 수업이다. 토론 수업은 다른 수업 방법들과 함께 논쟁 수업을 구현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다.
특히 논쟁 수업은 민주시민교육의 관점에서 비판적 사고와 시민성 교육에 도움이 된다. 교실에 가만히 앉아 교사의 말을 노트에 적기 바쁘고 밑줄만 죽죽 긋다가 끝나는 수업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다.
지난 9월20일 오후 경기 숙지고등학교에서 ’논쟁이 살아있는 교실’ 공개 수업이 열렸다. 진행팀 학생들이 논쟁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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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을 피해가야 좋은 교사일까?
존 듀이의 계보를 잇는 세계적인 교육철학자인 ‘넬 나딩스’는 <논쟁 수업으로 시작하는 민주시민교육>에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은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하고, 이런 능력은 공교육 현장인 학교에서 길러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논쟁 수업은 찬성과 반대 중 누가 이기느냐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 학생들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이해하고 협력하는 도구로써 기능한다. 논쟁 수업이 민주시민의 필수 덕목인 타협과 관용, 공동체 의식을 기르는 데 마중물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다.
나딩스는 “좋은 교사는 교실에서 논쟁을 피해가야 한다는 오해가 있다. 교육의 중립성에 대한 오해가 고정된 교과지식만을 습득하게 만든다”며 “대화와 토론을 통해 차이를 이해하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민주사회에서, 이런 교육 풍토는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를 가로막고 주체적 민주시민으로 자라는 걸 방해한다”고 강조했다.
박경록 교사는 “교과서적 정답이 아닌 논쟁거리로 가르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며 “역사 교과와 융합할 수 있는 종교, 젠더, 인종, 빈곤 등 논쟁 이슈들을 교실로 끌고 들어오면 논쟁 수업이 더욱 풍성해진다”고 말했다. “사회현안 논쟁형 역사 수업을 해보면, 아이들이 자료를 조사안 뒤 관련 기사를 읽어보고 온다. 교실에서 찬·반 토론을 할 때 각자 입장이 달라도, 상대 발언자의 의견을 경청하는 훈련도 된다.”
지난 9월20일 오후 경기 숙지고등학교에서 ’논쟁이 살아있는 교실’ 공개 수업이 열렸다. ‘진행팀’ 학생들은 각 모둠을 돌면서 주어진 과제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힌트를 준다.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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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수업은 이렇게 준비한다
논쟁 수업은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와 연결돼 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1976년 서독의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는 교육자·정치가·연구원 등이 독일의 소도시 보이텔스바흐에 모여 만든 교육 지침이다. 학생에 대한 교사의 강압과 교화를 금지하고, 사회적으로 논쟁이 있는 사안은 교육 현장에서도 논쟁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 등이 주요 골자다.
논쟁 수업은 어떻게 시작할까? 경기권 역사 교사들과 함께 논쟁 수업을 연구하는 이동욱 교사는 ‘거꾸로 수업’(강의보다는 학생들과 상호작용하거나 심화된 학습활동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교수학습 방식) 방식을 채택해 논쟁 수업을 진행한다.
이날 공개수업에서 학생들의 워크시트가 이미 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는데, 거꾸로 수업 방식을 적용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교사가 나눠준 3·1운동 관련 자료를 미리 읽은 뒤, 제시된 과제이자 수렴형 발문인 ‘두잉 히스토리’를 개인별 과제로 해결해왔다. 이를테면 ‘대한광복회(1915)에 대해 설명하시오’ ‘3·1운동의 배경, 전개 과정, 결과에 대해 설명하시오’ 등의 문항이다. 일종의 예습 과정이다. 예습이 되어 있으니 논쟁 수업 참여도와 집중도는 자연스레 높아진다.
논쟁 수업 1차시에는 모둠별로 개인별 과제에 관해 발표, 질의·응답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경우 교사가 보충 설명하며 해당 차시의 교과 지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때 ‘진행팀’ 학생 두 명은 각 모둠을 돌면서 주어진 과제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힌트를 준다.
2차시에는 확산형 발문인 ‘싱킹 히스토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게 된다. 싱킹 히스토리가 바로 이날 수업 주제인 ‘3·1운동의 정신은 대한민국에서 실현됐다고 볼 수 있는가?’였다.
이때 학생들은 찬성과 반대 중 한쪽을 택한다. 책상을 두 입장이 마주보는 토론 대형으로 정렬한 뒤 찬반 논쟁이 시작되면, 누구 하나 빠뜨리지 않고 상대방 의견을 경청한다. 자신과 다른 관점을 가진 친구가 이야기해도 관조하거나 ‘딴짓’하지 않는 태도가 훈련이 돼있었다.
논쟁 수업은 ‘비경쟁 토론’으로 진행한다,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아는 것을 나누고 공유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이제실 경기도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 장학관은 “최소 발언 인원수 원칙에 따라 발언권을 독점하지 않도록 학생들 스스로 조율하는 것도 논쟁 수업의 큰 부분”이라고 전했다. “논쟁 수업은 학생들이 수업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집단 지성을 활용해 논쟁한 뒤 결과를 도출해나가는 게 바로 민주시민 교육이다.”
글·사진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
“지식 전달이 아니라 논쟁하며 자기 생각 만드는 것”
인터뷰/ 논쟁 수업 이끄는 이동욱 교사
바짝 짧게 자른 머리, 자신감 있는 화법. 한 손에는 노트북, 다른 손에는 수업 자료가 가득 들려 있었다. 이동욱 경기 숙지고등학교 역사 교사의 첫인상이다.
흔히 역사 선생님이라고 하면 ‘지긋한 나이의 생활한복을 입은 선생님’이 떠오르는데, 이 교사는 체육 선생님 같은 다부진 면모가 돋보였다.
9월20일 오후, 이 교사의 ‘학생 주도형 논쟁 수업’(이하 논쟁 수업)을 취재했다. ‘역사 수업에서 논쟁은 어떤 의미인가?’를 놓고 이 교사와 일문일답했다.
논쟁에 뿌리를 둔 근현대사 수업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근현대사 교육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역사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해관계인의 의견이 엇갈리기도 하고, 논쟁 중인 주제가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식민지 수탈론과 근대화론,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 근대의 출현과 함께 나타나 서로 대립하는 담론 등을 논쟁 방식으로 톺아보는 것이다.
일방적인 지식 전달 방식 수업으로 교육한다면, 학생들은 아마 역사에 관해 아무런 의심조차 갖지 않을 것이다.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지 자신의 마음가짐을 돌아보고, ‘그때 그 사건’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을 정리해보는 게 바로 논쟁 수업이다.”
‘역사는 어렵다’는 인식이 있는데.
“부모 세대는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을 받았다. 사건의 발생 연도와 전쟁 이름 같은 것을 외우려니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학생을 ‘가르침받아야 할 집단’으로 바라봤던 20세기를 지나, 개개인으로 인식하는 21세기에는 역사의 맥락을 파악하고 크게 바라보는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수업해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논쟁 수업’이다. 수업은 ‘지식이나 기술을 전수’하는 일이 아니라, ‘문제 제기, 또는 과제 부여를 하면서 학생들이 질의응답하고 논쟁하며 자기 생각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본다.”
수업의 기획·연출자인 교사는 어떤 역할을 하나.
“요즘 학생들이 교과서적 언어를 잘 몰라 말뜻을 알려줘야 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때 ‘논쟁 팩트 체커’로서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근현대사 수업의 기획자이자 연출자로서 ‘읽기-생각하기-쓰기-발표하기-논쟁하기-생각의 재정립’ 단계를 거치는 형태로 수업을 설계한다. 실제 수업은 한 주제당 2차시로 진행한다. 1차시는 내용 요소 정리와 모둠별 토론, 2차시는 두 입장이 서로 마주 보도록 책상을 재배치해 전체 토론을 한다. 그 뒤에는 모든 학생이 저마다 논술형 수업 일기를 쓴다. 논쟁 뒤 갖게 된 자기 생각을 정리하도록 돕는 것이다.”
글·사진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