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덕수초 5학년 4반 이태숙 교사가 학생들에게 그림책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어주고 있다. 이 교사는 최근 아이들에게 읽어준 그림책 기록을 모은 독서 에세이 <하루 한 권, 그림책 공감 수업>을 출간했다. 정고운 기자
오전 8시40분. 서울 덕수초 5학년 4반 학생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다. 등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할 법도 한데, 학생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선생님을 기다린다. “자, 시작할까요?” 이태숙 담임 교사의 말에 학생들의 눈이 반짝였다. 이 교사의 손에는 다름 아닌 ‘그림책’이 들려 있었다. “오늘은 환경을 주제로 한 마지막 책을 읽을 거예요. 표지를 보면 그림이 흐리게 표현돼 있죠?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인공이 사라질 거 같아요!” “지키려던 걸 잃는 내용 아닐까요?” 학생들이 저마다의 느낌을 쏟아냈다. 이 교사가 본문 읽기에 들어가자 학생들의 집중도는 더 높아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읽을게요.” 20분이 금세 흐르고 선생님이 책을 덮자 학생들은 교탁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러곤 아쉬운 듯 미처 다 읽지 못한 그림책을 이리저리 살폈다. 새 학기가 시작된 뒤 매일같이 펼쳐지는 모습이다.
아침마다 그림책 읽어주는 이태숙 교사. 정고운 기자
이 교사는 5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학생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다. 30년 교직 생활을 하는 동안 누구보다 독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이 교사는 어떻게 학생들에게 독서 습관을 길러 줄 수 있을지 고민하다 아예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림책을 선택한 이유 역시 책을 향한 학생들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기 위해서다. “그림책을 읽어줄 때 아이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요. 20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경험할 수 있으니 이만한 게 없죠.”
아침마다 그림책 읽어주는 이태숙 교사. 정고운 기자
그림책, 심리적 장벽 낮춰줘
그가 읽어주는 그림책 목록에는 자신만의 규칙이 있다. 바로 ‘주제별 읽기’다. 자존감, 독서 습관, 친구관계, 가족, 환경, 인권 등 시기별로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여러 권의 책을 읽어 주는 방식이다. 학기 초에는 자존감을 주제로 <너는 최고의 작품이란다> <치킨마스크> <내 귀는 짝짝이>를, 가족의 달 5월이면 <나비를 잡는 아버지> <알을 품은 여우>, 과학의 날에 맞춰서는 환경을 주제로 <플라스틱 섬> <모아비> <나무를 심은 사람> 등을 읽어준다. 한 주제당 많게는 10권이 넘는 책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 교사는 1200여권의 그림책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주제에 맞는 책을 직접 정한다. 엄청난 독서량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주제별 읽기는 한 주제마다 2~3주에 걸쳐 진행하는데, 이 기간에 아이들은 한 가지 주제 속에서도 다양한 관점으로 이야기하는 그림책을 접하게 된다. “주제별 읽기를 통해 다채로운 시각을 접하면서 아이들의 생각이 커지고 사고는 깊어지게 됩니다. 자신만의 세계를 키워가는 과정이지요. 알게 모르게 생긴 고정관념이나 편견에서도 벗어날 수 있답니다.” 편협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사고 확장을 돕기 위해 이 교사는 주제별 읽기 방법을 고안해 냈다.
매일 아침 20분씩 그림책을 읽어주기만 했을 뿐인데 아이들의 독서 습관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등교하면 가장 먼저 책을 폈다. 쉬는 시간에 학교 도서관으로 가 책을 고르는 재미도 알게 됐다. 같은 책을 읽고 나누는 소감은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이야깃거리다. 친구들과 함께 읽고 싶다며 학교로 책을 가지고 오는 학생들도 생겼다. “원래 책을 안 좋아했는데 이제 어려운 책에도 도전해볼 만한 용기가 생겼어요.” 윤서는 올해 들어 책 읽기에 자신감이 바짝 붙었다고 말했다. 지율이는 편식하던 책 읽기 패턴을 완전히 바꿨다. “전에는 만화책만 봤어요. 그런데 선생님을 만나고 만화책 말고 다른 종류의 책도 읽기 시작했어요. 막상 읽어보니 재밌더라고요.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요.” 조은숙 그림책 연구가는 “그림책은 이해력이나 독서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의미를 포착해 내는 경험을 할 수 있는 매체다. 이 때문에 아이들이 위축되지 않고 그림책 한권을 전부 읽는 과정에서 온전히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1200권이 넘는 그림책을 소장 중인 이태숙 교사는 교실 한편에 큰 책꽂이를 두어 아이들에게 주기적으로 새로운 책을 소개한다. 정고운 기자
자신에게 질문지 만들어 생각 정립
그렇다면 책을 잘 읽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 이 교사는 책 읽기의 완성은 사고를 확장시키는 ‘질문 만들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책을 다 읽으면 그대로 휘발시키는 게 아니라, 책을 통해 자신만의 생각을 정립하는 과정이 반드시 따라야 해요. 그 방법으로 저는 질문 만들기를 활용합니다.” 이 교사는 매주 금요일 한 시간씩 ‘생각 너머 생각’이라는 수업을 진행한다. 책에 관해 각자 질문을 만들고 그 질문을 토대로 짝과 토론을 한 뒤 생각을 정리하는 글쓰기로 수업을 마무리한다. 그런데 질문을 만들 때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칙이 있다. 책 안에 정답이 없는 질문을 만들 것. 책에서 찾을 수 없는 문제를 만들라니 아이들은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다가도 곧장 깊이 있고 철학적인 질문을 만들어나간다. “질문하지 않으면 사고의 확장은 일어나지 않아요. 잘 만든 질문으로 생각을 나누고 관점의 깊이를 더하는 거죠.”
좋은 책을 고르는 팁도 궁금했다. 이 교사의 답은 명쾌하다. “아이가 고른 책이 가장 좋은 책이에요. 아이가 읽고 싶어하는 책이니까요.” 그는 부모가 아이의 책을 고를 때 아이의 나이가 아닌, 이해력 수준에 초점을 맞춰 골라야 한다고도 조언했다. 책과사회연구소 백원근 대표 역시 “아이의 독서 세계는 어른이 만들어 놓은 공간만큼 발달한다. 자녀의 나이에 따라 책을 고를 게 아니라 아이가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는 책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멋진 일이에요!” 요즘 <검은 후드티 소년>을 읽고 있다는 진서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거창한 효과를 바라며 책을 읽어주는 건 아니에요. 아이들이 책을 통해 알게 하고 싶어요. 책은 나를 참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구나!” 이 교사의 바람처럼 쌓여가는 책만큼 아이들 마음에 단단한 근육이 자라나고 있었다.
정고운 기자
nimok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