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세대라면 그렇게 직을 걸고 전교조 창립이라는 결단을 내리기는 힘들어요. 희생을 무릅쓰고 참교육 길을 걸으신 선배님들이 존경스러워요.” “전교조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려면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게 중요해요.” 교육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교조 소속 윤병선(오른쪽부터), 김현석, 정보람 교사가 지난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전교조 본부 사무실에서 한 인터뷰에서 앞서 전교조 30년을 상징하는 시대별 물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학급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는 교사,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반 학생들에게 자율성, 창의성을 높이려 하는 교사, 직원회의에서 원리 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 아이들한테 인기 많은 교사….”
1989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창립됐을 때 당시 문교부(현재의 교육부)가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라며 일선 교육청에 내려보낸 공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전혀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전교조 교사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정부가 공인해줬다. 학생과 학부모, 동료 교사들이 접하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실제 모습이기도 했다. 절반이 넘는 세월 동안 권력의 탄압을 받아왔지만, 전교조가 교육민주화와 참교육의 큰 기둥으로 성장해온 힘이다.
하지만, 오는 28일 출범 30주년을 맞는 전교조는 법외노조 문제뿐 아니라 국민 지지 회복, 젊은 교사들의 적극적 참여 등 여러 과제를 안고 있다. 세대가 다른 전교조 교사 3명으로부터 지난 30년에 대한 평가와 성찰, 미래 고민 등을 들어봤다. 창립세대인 윤병선, 2세대인 40대 김현석, 3세대인 30대 정보람 선생님을 지난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전교조 본부 사무실에서 만났다.
“두려웠죠. 전교조를 만들면 파면하고 해직하겠다고 정부가 엄포를 놓고 있었는데 왜 겁이 안 나겠어요? 그래도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진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동참했지요.”
전교조 창립을 주도했던 교사 중 한명인 윤병선(60·휘봉고 영어교사)이 30년 전을 회상하면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전교조를 결성하면 어느 정도 희생은 불가피할 거라고 각오는 했지만, 그렇게 무자비하게 1500여명을 해직할 것이라고는 예상을 전혀 못 했어요. 기껏해야 시도별로 한두명씩 대략 30여명 정도가 해직될 거라고 생각했었죠.”
“매우 어렵고 힘든 결정을 선배님들은 어떻게 그렇게 과감하게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할수록 놀라워요. 지금 저희들 세대는 그렇게 못 할 겁니다. 임용고시를 통해서 어렵게 교사가 됐는데 직을 걸어야 한다면 과연 얼마나 나설 수 있겠어요? 제가 교사가 될 때 서울에서 과학교사는 4명만 뽑았거든요.” 2006년에 교사 발령을 받아 올해 14년차 중견교사인 김현석(40·영림중 과학교사·전교조 서울지부 수석부지부장)이 말했다.
“저는 전교조보다 겨우 한살 더 많아서 당시 상황에 대한 감이 전혀 없어요.(웃음) 그러나 전교조 창립에 나선 선생님들이 정말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워요. 잃을 게 많은 분들이 자기희생을 각오했다는 것뿐 아니라 그분들이 하나같이 좋은 교사였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경기도 지역 신규 교사 연수 때 전교조 홍보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옛날 자료들을 보다가 당시 문교부(교육부의 전신)가 일선 교육청에 내려보낸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라는 공문을 봤어요. 거기에서 제시된 항목들 하나하나가 우리가 따라야 할 좋은 교사의 표본이더군요.” 올해 6년차 교사인 정보람(31·남양주 평동초)도 처음 인사를 나눈 윤병선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윤병선(서울 휘봉고) 교사는 1989년 전교조 창립 주역 중 한명이었다. 초대 전교조 쟁의국장을 맡았으며, 지금은 해직교사들의 완전한 명예회복을 위한 원상회복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우리가 두려운 건 아이들의 눈빛”
1989년 5월28일 전교조가 출범한 직후 문교부는 일선 교육청에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거기에 따르면, 전교조 교사는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학급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는 교사,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반 학생들에게 자율성·창의성을 높이려 하는 교사, 생활한복을 입고 풍물패를 조직하는 교사, 직원회의에서 원리 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 아이들한테 인기 많은 교사…”였다. 한마디로 교육 열정이 넘치는 교사였다.
윤병선도 그랬다.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잘 못하는 성격이어서 교직원회의에서 “원리 원칙을 따지며 발언”하지는 못했지만,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하고 “아이들한테 인기 많은 교사”였다. 1981년 서울 강북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초보교사 시절부터 학기 초면 아이들과 주말 등산을 갔고, 여름방학 때는 1박2일 캠핑을 했다. 그때 제자들은 지금도 자주 연락을 해온다.
윤병선은 전교조 창립 때 결성식 현장에 있지 못했다. 그는 건국대 대기조였다. 경찰은 애초 창립대회가 예정됐던 한양대를 원천봉쇄했다. 이에 대비한 1차 예비장소가 건국대, 2차가 연세대였다. 한양대가 막히자 대부분의 교사는 건국대로 모였다. 경찰의 감시는 건국대로 쏠렸고, 그 틈에 윤영규(2005년 작고) 초대 위원장과 이수호(70) 사무처장 등 지도부는 연세대에 들어가서 창립대회를 마쳤다.
“오늘의 이 쾌거는 학생, 학부모와 함께 우리 교직원이 교육의 주체로 우뚝 서겠다는 엄숙한 선언이며 민족·민주·인간화교육 실천을 위한 참교육운동을 더욱 뜨겁게 전개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민족과 역사 앞에 밝히는 것이다. …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저들의 협박과 탄압이 아니라 우리를 따르는 학생들의 해맑은 웃음과 초롱초롱한 눈빛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동지여! 함께 떨쳐 일어선 동지여! 우리의 사랑스러운 제자의 해맑은 웃음을 위해 굳게 뭉쳐 싸워 나가자.”(전교조 창립선언문)
1989년 5월28일 경찰의 봉쇄를 뚫고 연세대에서 모인 교사들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식을 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 직후 연세대에서 빠져나온 지도부 일부가 건국대로 왔다. 이들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1천여명의 교사 앞에서 ‘전교조 결성 보고대회’를 열어, 윤영규가 창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회가 무사히 끝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환호성이 일제히 터져나왔고, 마음 졸이고 있었던 윤병선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윤병선은 전교조 초대 쟁의국장을 맡았다. 전교조의 전신이었던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 1987년 결성)에서도 교권위원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그는 1988년 하반기부터 치열했던 내부 논쟁에서는 교원노조 결성에 반대하고 ‘자주적 교원단체’(자교단)를 유지하자고 주장했다.
“교원노조는 시기상조라고 봤어요. 당시 교원노조가 합법이 아니어서 대규모 피해가 우려된데다 아직은 교원들의 단결된 힘이 약하다고 생각했지요. 당시 3만명이던 전교협 회원이 5만명이 될 때까지는 기다리자는 입장이었죠. 그런데 전교협 서울지역 대의원대회에서 표결한 결과 학교 현장을 바꾸려면 정부와 교섭력을 가질 수 있는 교원노조로 가야 한다는 쪽이 한표 차이로 자교단 쪽을 이겼어요. 결론이 난 뒤부터는 저도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갔죠.”
유신독재 말기인 19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닌 윤병선은 학창시절에 서클활동을 하긴 했지만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다. 1981년 교사가 된 뒤 부조리한 학교 현실을 접하면서부터 교육운동가가 됐다. ‘교장의 명을 받아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당시 교육시스템 때문에 교직 사회에 판쳤던 권위주의와 관료주의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또 자신들의 비민주적 행태를 은폐하면서 아이들에게 거짓을 가르치도록 강요하는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심이 생겨났다.
“전두환이 저지른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조차 가르칠 수 없었어요. 교육 현장을 바꿔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했죠. 그런데 신참 때 선배 교사들이 임용일 문제에 대해 서명을 받아서 시정하는 것을 봤어요. 당시 관료적 행정 때문에 임용일이 3월1일이 아니라 3월 중순 심지어는 4월이 되기도 했는데 교사들이 뭉치니까 고쳐지더라고요.”
제자를 전교조로 이끈 건 스승
윤병선이 1985년 교사들의 독서 소모임을 꾸린 것은 이런 경험에 힘입어서였다. 동료 교사 5명과 함께 교육과 관련한 외국 서적 등을 읽고 토론하면서 우리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키워갔다.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화운동이 불붙기 시작했을 때였다. 12대 총선(1985년 2월12일)에서 관제 야당이었던 민한당을 제치고 김대중과 김영삼이 힘을 합쳐 만든 선명 야당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켰으며, 대학가의 민주화 시위도 전국으로 확산됐다. 교사들도 ‘한국와이엠시에이(YMCA)중등교육자협의회’(1982년 설립)를 중심으로 한 공개 조직뿐 아니라 독서모임 등 각종 비공개 조직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이런 움직임들이 모여 역사적인 ‘5·10 교육민주화선언’(1986년)으로 나타났다.
“학생들과 함께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우리 교사들은 오늘의 참담한 교육 현실을 지켜보며 가슴 뜯었다. … 이제 우리는 맹랑한 꼭두각시의 허무한 몸짓을 그만 그쳐야 한다”는 교육민주화선언은 더 이상 굴종하지 않겠다는 교사들의 목소리이자 참교육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그 뒤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은 자주적인 전국 조직인 ‘전국교사협의회’(1987년)를 만든 데 이어 1989년 5월 마침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저는 2006년 28살에 교사가 된 뒤에 전교조에 거의 바로 가입했어요. 당시는 합법이어서 가입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기도 했지만, 처음 만나 친해진 동료인 도덕과 미술 선생님이 전교조 소속이셨거든요. 교육에 대한 열정이 높은 분들이었는데 초보인 저에게 어떻게 아이들을 만나야 하는지 등등을 세세하게 알려줬어요. 그분들을 좋아하다 보니까 바로 스카우트됐죠.(웃음)”(김현석)
2006년 발령받은 김현석 교사는 서울 영림중 과학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현재는 서울지부 수석부지부장으로 파견근무 중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현석을 전교조로 이끈 ‘보이지 않는 손’은 전교조 선생님이었다. 고향인 강원도 횡성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수학 선생님을 무척 따랐다. 그는 잘 가르치기도 했지만, 짬이 날 때는 늘 철사로 국화꽃받이를 만들어서 화단을 가꾸는 좋은 성품을 가진 분이었다. 그분을 보면서 김현석의 장래희망이 정해졌다. 교사가 된 뒤 인사드리러 가서야 존경하던 은사가 전교조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현석의 좌표가 더 뚜렷해지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한 아이에게만 잘해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아이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생활했어요. 그런데 우리 반 학생 중 전교회장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어느날 ‘선생님은 믿을 수 있겠다’며 펑펑 울면서 어려운 가정형편을 털어놓고 차상위계층에게 주는 지원을 요청했어요. 그 전에는 아이가 자존심 상할까봐 그런 얘기를 일체 안 했대요. 그 일이 있은 뒤 그 아이와 가까워지고 싶어서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도 더 깊게 가져갔어요. 아이들 집에 가서 부모님들과 밥을 같이 먹기도 하고, 또 우리 집에 아이를 불러서 우리 식구들과도 어울리는 등 저와 아이들의 삶을 깊이 연결시켰어요.”(김현석)
“저는 중2 때 담임 선생님이 전교조였어요. 당시 보수언론에서 매우 안 좋게 공격할 때였는데도 그분은 전교조 소속이라고 당당히 밝히셨어요. 물론 학생들에게 잘해주셨고 잘 가르치셨어요. 그때가 2002년이었는데 미군 장갑차에 희생당한 효순이, 미선이가 저랑 동갑이었어요. 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주말에 혼자 경기도 부천에서 의정부까지 전철 타고 가서 촛불집회에 한번 참석하기도 했어요. 그 선생님을 보면서 교사가 되면 당연히 전교조를 해야 하는구나 하고 어릴 때부터 생각했었죠.(웃음)”(정보람)
정보람 교사는 2014년 경기도 고양에서 첫 교직 생활을 했으며, 현재는 남양주시 평동초에 재직 중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정보람이 경기도 일산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은 2014년은 전교조가 박근혜 정부에 의해 법외노조가 된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6만명 조합원 가운데 해직교사 9명이 있다는 것을 빌미로 2013년 10월 전교조의 합법적 지위를 박탈했다. 그러나 해고 노동자의 노동조합 가입이나 활동은 국제기준(ILO 협약)이나 노동조합법 취지로 봤을 때 문제 될 게 없을 뿐 아니라 2004년 대법원 판례(2001두8568)에서도 인정된 것이었다.
“저는 전교조가 법외노조라고 해서 가입을 주저하지는 않았어요. 법외노조가 뭐고 합법노조가 뭔지도 잘 몰랐거든요. 교사가 된 지 석달 만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어요. 마음이 너무 아파서 학교가 끝나면 광화문 세월호 천막에 나가 자원봉사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때 광화문에서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는데 그분들이 전교조였어요. 자연스럽게 저도 전교조에 들었죠.”(정보람)
전교조 이후 학교에서 사라진 것들
윤병선은 전교조 출범 뒤에 1989년 7월 재직 중이던 서울고에서 쫓겨났다. 교사가 된 뒤 닥친 두번째 해직이었다. 첫번째는 1986년 ‘5·10 교육민주화선언’ 행사장에서 뿌린 유인물과 관련해 독서모임 동료들과 함께 구속(민족민주교육투쟁 사건)돼 1년 가까이 수감됐을 때였다. 당시 서울 성동고에서 학생들이 강압적인 야간자율학습에 반대하면서 학교 유리창을 깨뜨려 징계처분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유인물은 그 학생들을 옹호하면서 자율적인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보면 어이없는 수감이었지만 당시는 교사들이 그런 작은 목소리를 내기만 해도 철창에 갇히거나 직을 잃었다. 그는 민주화 이후인 1988년 4월에 복직했다가 1년여 뒤에 또다시 전교조 창립으로 해직됐다.
“당시 해직자들에게는 조합원들이 낸 후원금으로 매달 조금씩 생계비를 줬어요. 저는 처음에는 B급이어서 16만원씩 받다가 1991년 결혼 뒤에는 C급으로 떨어져서 8만원을 받아서 생활했어요.(웃음) 살기 팍팍했지만 한국 교육이 하나씩 바뀌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정말 보람을 느끼던 시절이었어요. 전교조가 출범한 뒤에는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학교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요. 학생 활동도 학생들 스스로가 계획하고 실천하는 식으로 이뤄지기 시작했어요.”(윤병선)
전교조가 자리잡으면서 전교생을 모아놓고 교장 선생님이 훈시를 하던 애국조회 등 전체주의적인 행사가 사라졌다. 교직사회에 만연했던 촌지 봉투도 점차 자취를 감췄다. 학생들에 대한 체벌 등 교사들의 폭력행위도 없어졌다.
“초임 교사 때 아이들에게 이른바 ‘사랑의 매’를 들었어요. 처음부터 생활지도부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등교시간에 교문지도를 맡았어요. 저랑 정말 친한 아이가 있었는데 집이 어려워서 술집을 경영하는 어머니를 밤늦게까지 돕느라 아침에는 늘 지각을 했어요. 이 애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에서 지각하면 매를 때리되 누적될 때마다 한대씩 추가하기로 했어요. 나중에는 스물일곱대까지 매가 늘어났어요. 작은 매였지만 엉덩이 스물일곱대를 때리면서 ‘내가 대체 뭐하고 있지. 사랑해서 때린다지만 이게 아이의 실질적인 변화에 도움이 될까’라는 데 생각이 미쳤어요. 그때서야 체벌을 반대하고 학생인권을 강조하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얘기가 옳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날부터 다시는 매를 들지 않았어요.”(김현석)
“저는 전교조에 가입한 뒤 그 사실을 학교 동료들에게 바로 얘기했어요. 좋은 교사로서뿐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다 드러내고 활동해요. 어떤 분들은 교사 생활이 그날그날 마감되는 하루살이 인생이라고 하는데 저는 삶과 교사로서의 가치관을 일치시키니까 그런 느낌은 전혀 없어요. 저의 모든 생활에서 아이들이 중심이고, 교실 공간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우선시하고 있어요.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배운 거예요.”(정보람)
전교조는 한국 교육의 수준과 질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전교조 활동가였던 한만중·이장원은 “전교조 참교육운동은 25년 이상 교과 수업의 혁신, 통일교육과 환경교육 등 새로운 가치 교육의 창출, 학생 활동 중심의 학급 운영 혁신, 학생 자치 활동 및 동아리 활동의 활성화를 이루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전교조와 참교육운동 20년 평가’, 2009년)고 평가했다. 정진화(2030교육포럼 준비위원회 공동대표)도 “전교조의 참교육운동을 통해 수업과 학급 운영의 새로운 방법이 학교 현장의 교사들에게 전파되었다”(<교사, 학교를 바꾸다>, 2016년)고 밝혔다.
“교사가 된 뒤 한참 동안은 수업 준비를 혼자 했어요. 전교조 선생님들을 주축으로 한 교과별 교사모임에서 오랫동안 개발해놓은 수업 방법이나 교재 등이 있어서 혼자 해도 충분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지금 일하는 학교는 혁신학교인데 거기서는 선생님들이 모여서 함께 수업 준비와 생활지도를 해요. 함께 논의하니까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수업을 할 수 있어서 훨씬 좋더라고요.”(김현석)
윤병선 교사
“참교육 중심 유지하기 위해선
국민지지 받는 전교조 되어야
89년 해직자 완전 명예회복과
법외노조 해결이 마지막 사명”
김현석 교사
“학부모가 전교조 잘 알기에
보수세력 공격은 두렵지 않아
과격한 연가투쟁 등 고집 말고
더 많은 동참 위해 전교조 변해야”
정보람 교사
“젊은 교사의 전교조 무관심을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교사들 양질의 교육환경과
아이들 행복한 학교 일치 노력을”
“보수세력의 전교조 때리기는 두렵지 않아요. 그러나 참교육 실천의 버팀목 노릇과 함께 교사들에게 내 곁의 든든한 노조가 되려면 전교조가 스스로 변해야 해요.” 세대가 다른 교사 3명은 전교조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는 같은 의견을 보였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전교조 본부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윤병선(왼쪽부터), 김현석, 정보람 교사.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전교조 역사 잘 모르는 젊은 교사들
혁신학교도 전교조가 이룬 성과 중 하나다. 혁신학교는 2009년 경기도교육감이던 김상곤이 처음 물꼬를 튼 뒤에 2010년 진보교육감이 대거 등장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됐다. 전교조 교사들은 주로 개별적으로 자기 교실 안에서 참교육을 실천해왔다. ‘우리(일반 교사)와는 다르지만 교육 본질을 추구하는 교사’(정진화, 앞의 책)라는 평을 받았지만 개별적인 실천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전교조 합법화 이후에도 여러 사정으로 2001, 2002년 두해를 빼고는 교육당국과의 중앙 단위 단체교섭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학교 전체를 혁신하자는 ‘새로운 학교 운동’이 일어났고, 전교조도 2009년 ‘제2의 참교육선언’을 통해 “교실 내에서 머물렀던 실천 활동을 학교 단위로 넓히”는 쪽으로 나아갔다. 구체적인 결과물이 자기주도적이고 토론 중심의 학습을 하는 혁신학교다. 학업성적 저하를 우려한 일부 학부모의 반대 등 논란이 없지 않지만, 수업 시간에 태반이 엎드려 자는 이른바 ‘교실 붕괴’나 학교 수업을 포기하는 낙오자가 없다는 점에서 혁신학교는 공교육의 새로운 모델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30년의 세월 가운데 절반 이상의 기간을 탄압에 저항해 싸우는 과정에서 전교조도 상처를 입었다. 무엇보다 참교육의 상징, 실력있고 헌신적인 교사들의 집합체라는 초기 이미지가 많이 옅어졌다. 보수세력의 전교조에 대한 부단한 색깔 칠하기 등이 주요 원인이기는 하지만, 전교조의 투쟁 방식 등과도 무관하지 않다.
“보수언론의 전교조 때리기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의 일방적인 전교조 죽이기를 보면서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있나 싶어서 뒤돌아보지만 희생양이 되어도 좋을 정도로 크게 잘못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의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지죠. 그러나 이런 억울한 것을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게 중요해요. 그동안 교원평가제도 도입 때 등 몇가지 사안에서 국민들을 설득하지 못한 채 강하게 반대한 것 등은 반성해야 할 대목이죠.”(윤병선)
“대부분의 전교조 선생님들은 학교에서 아이들만 보면서 열심히 활동하는데도 보수언론이 과장되게 왜곡해서 공격하는 것을 보면 억울하죠. 앞으로 국민에게 더 사랑받으면서 이런 공격을 이겨내고 싶어요. 그럴 자신이 있고요. 왜냐하면 지난 10년간 보수언론과 정치권력이 그렇게 강력하게 전교조 탄압을 했음에도 학부모들은 실제로 겪어보면 전교조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시거든요. 하지만 우리도 고칠 게 많아요. 지도부가 일방적으로 높은 수준의 투쟁 방법을 결정해서 끌고 갈 게 아니라 6만명 조합원이 다 참여할 수 있는 낮은 수준의 투쟁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힘이 생기잖아요. 그동안 자주 했던 연가투쟁이 대표적이죠. 대외적으로 수만명 조합원이 다 참석할 것처럼 큰소리쳤지만, 실제로는 몇천명밖에 연가투쟁에 참여하지 못했잖아요. 국민들에게 과격하다는 이미지를 주는 원인을 제공했지요. 그런 점은 전교조가 변해야 해요.”(김현석)
“보수언론이나 태극기부대가 전교조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은 별 타격이 되지 않고 겁나지도 않아요. 그들은 원래 그러니까요. 정말 안타깝고 속상한 것은 제 또래의 젊은 선생님들이 전교조에 대해서 ‘왜 굳이 가입해야 하느냐’고 물을 때입니다. 선배님 세대는 자신들이 비록 가입하지 못하더라도 ‘전교조는 있어야 하는 조직이고 많은 일을 했다’고 동료 교사들이 평가했잖아요. 하지만 저희 세대는 그런 역사를 잘 모르는데다 전교조가 아니더라도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원하는 교육자료를 인터넷 등에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전교조의 필요성을 못 느껴요. 그런데 사실 그런 자료가 대부분 전교조 선생님들이 만든 것이어서 참 아이러니해요.”(정보람)
한때 10만여명에 이르렀던 전교조 조합원 수는 현재 약 6만명 수준이며 40~50대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전교조 법외노조를 정부가 직권으로 취소할 것을 요구하는 천막농성이 최근 계속되고 있다. 지난 21일 오전 권정오 전교조 위원장(뒷줄 오른쪽 셋째) 등 지도부와 해직자들이 서울 광화문 소공원에 친 천막 앞에서 “청와대는 응답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아직 권위주의 물들지는 않아
정년 퇴임을 1년 앞두고 있는 윤병선의 요즈음 고민은 전교조 1세대 해직교사들의 완전한 명예회복과 법외노조 문제다. 원상회복추진위원장을 맡은 것도 지난 30년의 짐을 후배들에게 넘기지 않고 스스로의 손으로 해결하고 싶어서다.
“1989년 전교조 해직교사들은 2000년에 만든 ‘민주화보상법’에 의해 모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이 됐어요. 그러나 증서 한장만 받았을 뿐 어떠한 실질적인 보상도 없었어요. 해직 기간 4년 반 동안의 임금을 못 받았고, 호봉 및 교육경력 인정도 안 됐어요. 늦게 교단에 복귀했거나 고령인 분들은 심지어 연금도 못 받고 있어요. 전교조 창립도 민주화운동의 하나였다고 평가받았으면 참여자들에 대한 불이익을 늦게라도 제거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박근혜 정부가 저지른 법외노조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국회에서 법을 고치거나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비준안에 대한 동의를 받기 전이라도 직권으로 취소할 수 있는데 촛불정부가 왜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윤병선)
2세대와 3세대 교사들의 강조점은 조금씩 달랐지만 학생과 교사, 학부모 모두가 행복한 학교를 만드는 데 전교조가 앞으로도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데는 일치했다.
“전교조의 미래 30년은 과거 30년처럼 참교육을 통해 주변 선생님들한테 존경받는 기조를 유지하는 것뿐 아니라 교육 현장의 여러 문제를 개선해서 선생님들에게 내 곁의 든든한 노조가 되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대부분의 선생님이 전교조에 자동적으로 가입하는 날을 만들어야죠. 개인적으로는 저를 기억해주는 아이들을 많이 만나고, 제 삶에 영향을 받아서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많아지는 게 꿈이죠.”(김현석)
“전교조가 앞으로도 참교육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젊은 선생들의 참여를 확대시켜야 해요. 선배들이 했던 ‘내가 좋은 교사이니 나를 보고 가입하라’는 식으로는 10만 회원으로 가기 어렵다고 봐요. 결국 교사들의 양질의 교육 환경과 아이들의 행복한 학교 환경이 같은 사안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둘을 일치시키는 노력을 하는 길밖에 없는 것 같아요.”(정보람) 인터뷰는 비어 있던 전교조위원장실에서 이뤄졌다. 도중에 권정오 위원장이 손님과 함께 불쑥 들어왔다가 설명을 듣고는 두말없이 나갔다. 사전 허락 없이 자기 방을 차지한 데 대해 불쾌하게 여기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2시간 반 동안에 다른 상근자들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위원장 자리에서 업무를 봤다. 서른살의 전교조가 아직 관료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전교조가 해결해야 할 난제와 고민을 풀 수 있는 힘이 엿보였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