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용샘의 ’학교도서관에서 생긴 일’】
고등학교 수업에 그림책 읽는 시간이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 모두 낯설고 생소한 경험이라 생각하겠지요. 저는 가끔 수업 시간에 그림책을 읽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처음 그림책을 읽어줄 때는 아이들도 불평을 늘어놓았고, 저도 부끄러웠지요. 덩치가 산만한 녀석들 앞에서 그림책을 꺼내는 일도 쉽지 않았고 어린이, 할머니, 아주머니 역할을 내 목소리로 재현하는 일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재밌습니다. 재미와 반전, 철학, 삶의 가치를 담아낸 책을 그림과 함께 10분 내외로 읽을 수 있으니 왜 이것을 이제 알았나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림책을 활용하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학생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자기 생각을 편하게 이야기하게 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제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읽어준 그림책을 몇 권 소개해볼까 합니다. 이번 글에서 소개할 책은 흥미로운 반전이 숨어 있는 <도서관의 비밀>(그린북)입니다. ‘그날은 내가 도서관에서 일한 지 딱 사흘째 되는 날이었어요’로 시작하는 책은, 20쪽을 넘어가면서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빨간 옷을 입은 사서가 도서관을 정리하면서 매일 밤 이상한 그림자를 봅니다. 이상한 사람 때문에 매일 도서관을 치워도 엉망이었지요. 몇 권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도서관의 빨간 책은 모두 펼쳐져 있었습니다. 사서는 범인을 꼭 잡고 싶었지요. 이때쯤 저는 학생들에게 그림책 읽어주는 것을 멈추고 ‘다음에 벌어질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보시오’라고 칠판에 적습니다.
아이들은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초록 옷을 입은 아이가 빨간 옷 입은 사서 선생님을 좋아해서 빨간색 책만 골라내 마음을 표현했고 결국 둘은 이루어진다는 상상, 자신만의 색이 없는 우울한 아이가 빨간색으로 열정을 찾으려 노력했고 사서 선생님과 독서토론 동아리를 하면서 자신만의 색을 찾아간다는 상상 등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갔습니다.
지면의 한계로 이 글에는 다 표현하지 못하지만, 다양하고 창의적인 상상을 한 학생들의 생각을 엿보는 것도 사서 교사로서는 참 즐거운 일입니다. 그림책이라는 재료가 부담이 없어서인지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상상하고, 발표합니다.
발표가 이어지고 책의 다음 장면을 보는 순간, 학생들은 모두 멍해집니다.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사서, 초록 옷을 입은 아이가 범인이라고 생각했던 자기 생각과 반대의 그림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책 어디에도 사서는 빨간 옷을 입었다고, 범인은 초록 옷을 입었다고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너무 쉽게 사서를 ‘여자’로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사실 저도 이 책을 처음 볼 때 그렇게 생각했고, 수백 명의 학생에게 읽혔지만,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의심 없이 읽었지요. 발표가 끝난 뒤 다시 처음부터 읽어봅니다. 그제야 빨간 옷을 입은 여자의 표정이 무언가에 쫓기는 듯 보입니다.
학생들에게 선입견이라는 단어를 꺼내봅니다. 누구인지도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상대나 어떤 상황을 내 마음대로 규정지어본 적은 없는지 물어봅니다. 버섯에 대한 오해로 버섯을 먹지 못했다는 학생부터 나이 많은 담임 선생님을 보고 일년이 지루할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정말 재미있다는 학생, 전학 온 친구에 대한 선입견 등 일상이 고정관념으로 얼룩져 있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됩니다.
그림책은 어린이 책이라는 것 또한 선입견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거창하게 짜임새를 갖춘 수업이 아니지만 학생들은 편하게 읽고, 불편한 일을 들춰봅니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지요. 고등학교 교실 속 그림책 수업이 가지는 묘미입니다.
황왕용 광양백운고등학교 사서교사, <학교도서관 활용 수업: 중·고등> 공저자
<도서관의 비밀>(그린북)
황왕용 광양백운고등학교 사서교사, <학교도서관 활용 수업: 중·고등>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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