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 한마디면 모든 표현 가능
변화하는 시대 새로운 말 있지만
공교육 과정에선 어휘력 키워줘야
단어 뜻 모르면 수학도 어려워해
초3 시기가 어휘력 잡는 골든타임
’낱말 보따리’ 크게 만들어주고
어원·동의어·유의어 등 찾아보며
’나만의 우리말 사전’ 직접 써봐야
변화하는 시대 새로운 말 있지만
공교육 과정에선 어휘력 키워줘야
단어 뜻 모르면 수학도 어려워해
초3 시기가 어휘력 잡는 골든타임
’낱말 보따리’ 크게 만들어주고
어원·동의어·유의어 등 찾아보며
’나만의 우리말 사전’ 직접 써봐야
학습의 기본은 어휘력
좋아도 ‘헐, 대박’, 싫어도 ‘헐, 대박’, 당황해도 ‘헐, 대박’이다. 국어 시험 답안지에 ‘문외한’을 ‘무뇌한’으로 써놓고도 왜 틀렸는지 모른다. 수학 시간이라고 다를 리 없다. 부등호와 등호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매번 틀리니,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학생) 되는 건 시간문제다.
■ 반에서 5등도 ‘연대하다’ 몰라
티브이 예능 프로그램 자막을 봐도 마찬가지다. 모든 상황과 맥락이 ‘대박’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짐)로 표현된다. 조선 시대 선비처럼 어려운 말을 쓰자는 게 아니다. 공교육 과정을 비롯해 아이들이 즐겨 보는 미디어에서만큼은 다양한 어휘와 표현을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중·고교에 올라간 학생들이 사회 교과서에 나온 ‘협의’ ‘사익’ 등 이미 배운 개념을 풀어내거나 비슷한 말 찾는 걸 어려워한다. 왜 그럴까. ‘빈어증’(貧語症)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빈어증은 어휘력이 부족해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말한다.
경기 ㅎ중학교 최아무개 교사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아이들이 단어 뜻을 몰라 수업 진도가 안 나가는 날도 있다”며 “반에서 5등 안에 드는 상위권 학생들도 ‘연대’ ‘상쇄’ 등 교과서 본문에 나온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 어휘력은 아이들의 히든카드
중·고등학교 진학 뒤 어휘력 부족으로 좌절하지 않으려면, 아이가 책을 접하는 시기부터 신경을 써주는 것이 좋다. 특히 전문가들은 초등학교 3학년 전후를 어휘력 잡는 골든타임으로 본다.
초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간 아이들과 학부모가 가장 당황하는 부분이 바로 교과목 수다. 2학년 때까지만 해도 국어, 수학, 통합 교과에 불과했던 것이 3학년이 되면 국어, 수학, 과학, 도덕, 음악, 미술, 체육, 영어를 비롯해 보조 교재까지 더하면 10권이 넘어간다. 수업시간에 이해해야 할 개념과 어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는 이야기다.
우리말 사전에서 ‘어휘’를 찾아보면 ‘어떤 일정한 범위에서 쓰는 낱말의 수효’라고 나온다. 즉, 어휘는 정해진 범위에서 사용되는 낱말의 목록과 그 구성 체계를 말한다.
<초등 3학년 늘어난 교과 공부, 어휘력으로 잡아라>를 펴낸 송재환 서울 동산초등학교 교사는 “다시 말해 어휘는 낱개의 낱말들이 모여 있는 보따리”라며 “이 보따리가 큰 사람도 있지만, 익힌 낱말이 많지 않아 보따리가 아주 작은 사람도 있다”고 설명했다. 아이들 각자 가진 보따리의 크고 작음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어휘력이라는 말이다.
송 교사는 20년 넘게 교직에 몸담으며 독서의 중요성을 크게 절감했는데, 그 바탕은 역시 어휘력이라고 강조했다. 어휘력은 낱말 보따리가 얼마나 크고 작은지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아이가 가진 보따리 속 낱말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능력까지를 어휘력이라고 본다.
어휘는 듣기와 읽기, 쓰기 등 모든 언어생활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이들에게 중요한 도구가 된다. 어휘력이 공부할 때 실질적 도움을 주는 ‘히든카드’가 된다는 말이다. 최숙기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는 “어휘력이 낮은 학생은 교과서 등 책을 읽은 뒤 이해하기 어려워 학습을 포기하기도 한다”며 “어휘력은 또래들과의 말하기, 수업시간 글쓰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이 어휘라는 도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일상대화는 물론 학교 공동체 구성원으로서도 불편을 겪게 된다는 말이다.
■ ‘융해, 기화’…뜻 알면 수업 쉬워져
학교 현장에서는 국어사전 활용 교육을 강화했다. 초등 4학년 1학기 8단원 ‘국어사전과 함께’에서 9차시만 배웠던 것을 지난해부터는 3학년 1학기 7단원 ‘반갑다, 국어사전’에서 8차시, 4학년 1학기 7단원 ‘사전은 내 친구’에서 9차시로 2년에 걸쳐 학습한다.
수업시수가 두배로 늘어나기는 했지만 ‘우리말 사전 찾기’ 활동은 초·중·고 12년을 통틀어 유일하게 초등학교에서만 다룬다. 송 교사는 “국어뿐 아니라 과학 수업에서도 융해, 기화, 액화 등 기본 뜻을 알아야 개념을 쉽게 잡을 수 있다”며 “아이들이 사전을 통해 모르는 단어를 직접 찾아보고 그 뜻을 익히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남들보다 빨리 배워야 한다는 선행학습, 눈앞에 놓인 교과 성적에 마음이 급해 무조건 암기하는 것만으로는 진짜 공부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아이가 이해한 뒤 자신의 어휘 보따리에 쟁여두는 것과 억지로 외워서 저장하는 ‘겉핥기식 공부’는 시작과 끝이 다르다.
교과서 예습할 때 미리 단어의 뜻을 찾아가기만 해도 수업 집중도가 높아진다. 공책 한권을 마련해 아이 스스로 써나가는 ‘나만의 우리말 사전’을 만들어주면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 교과서 속 모르는 단어에 밑줄 친 뒤 손 글씨로 하나하나 공책에 옮겨본다. 해당 낱말에서 뿌리내린 단어의 어원, 그것과 관련된 숙어, 속담, 반의어, 유의어 등을 함께 옮겨 적으면 ‘이건 내가 아는 단어다’라는 자신감도 생기고 학습에 더욱 흥미를 갖게 된다.
<공부가 쉬워지는 초등 독서법>을 펴낸 김민아 병점초등학교 교사는 “아이가 수학을 못하거나 수업시간에 산만한 이유는 어휘력 부족인 경우가 많다. 수학 문제에 나온 낱말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못 푸는 경우가 있다”며 “한데 보호자들은 그 대안으로 좋은 수학 학원을 찾는다”고 했다. 수학을 비롯해 국어, 과학, 사회 등 모든 교과의 기본 개념은 결국 어휘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 책 읽는 아이의 어휘력은 다르다
다양한 단어 뜻을 알고 있다는 것은, 책을 읽을 때 그만큼 시간을 적게 써도 된다는 말이다. 아이들은 교사와의 대화, 또래끼리의 대화, 보호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늘 새로운 어휘를 습득한다.
스펀지처럼 무엇이든 잘 흡수하는 아이들이 일상대화 이외에 어휘력을 폭발적으로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단연 독서뿐이다.
김 교사는 “아이들은 책을 읽으며 자신이 아는 범위 이상의 낯선 단어들을 만나게 된다”며 “굳이 바로 사전을 찾지 않더라도 앞뒤 문맥을 보고 뜻을 짐작하며 읽거나, 교사나 보호자에게 물어 뜻을 알아내기도 한다”고 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책 읽으며 해당 단어의 뜻을 생각해보거나 찾아본 단어는 아이 머릿속에 장기 기억으로 남게 된다.
책 읽기를 통해 어휘력을 키운 아이들은 글쓰기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김 교사는 “일기나 활동지를 보면 아이들 각자의 어휘력이 한눈에 보인다”며 “평소 책을 즐겨 읽은 아이들은 일단 글을 길게 쓸 수 있다. 주제에 맞는 글을 다양한 단어를 활용해 써낸다”고 설명했다. 초등 시기에 낱말의 뿌리를 촘촘하고 굵게 다져놓으면, 중·고교 입시뿐 아니라 평생 독서 활동에 도움이 된다고도 덧붙였다.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
초등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발표하고 있다. 기초 어휘력이 탄탄해야 ’말하기 영역’에서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한겨레> 자료사진
초등학교 한글 어휘 교육 가운데 낱말 맞추기 놀이. 탁기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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