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8일 국가인권위원회 인권교육센터에서 열린 ‘2018 초·중등 교과서 모니터링 결과 발표 및 토론회’에서 참가자들이 발표를 하고 있다. 김지윤 기자
“엄마는 집안일만 하거나 사회 속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아빠는 회사 다니며 생산적이고 중요한 일을 하는 것으로 묘사한 삽화는 30년 전이랑 비슷한 것 같다. 나를 비롯해 주위 사람 대부분이 ‘워킹맘’인데 교과서에 현실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게 아쉽다.”
마흔살 김민혜씨는 초등학교 3학년 딸의 교과서를 훑어본 뒤 이렇게 말했다. 교과서 속 작은 그림 하나하나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싶으면서도, 공교육 12년 기간 동안 아이들이 직접 보고 배우는 책이라는 점에서 꼼꼼히 들여다보게 된다고 했다. 30년 전 자신이 딸과 같은 나이였을 때의 성 역할 묘사가 여전하다는 것이 씁쓸하다고도 덧붙였다.
교과서 속에서 주체적으로 일하는 인물 대부분이 남성인 데 비해 장바구니를 들고 쇼핑하는 사람은 모두 여성으로 그려졌다. 삽화에서 여성은 치마만 입고 있거나 정치인, 기업 대표 등이 대부분 남성으로 등장하는 등 변화한 시대와는 맞지 않는 그림과 표현이 적지 않았다.
■ ‘인권 렌즈’로 교과서 분석해
지난 2월28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서 ‘2018 초·중등 교과서 모니터링 결과 발표 및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는 구정화 경인교육대학교 교수와 이기규 서울 온곡초등학교 교사(인권위 인권교육전문위원), 이은진 서울 발산초등학교 교사, 서한솔 서울 상천초등학교 교사(초등성평등연구회 대표), 팽주만 교육부 교과서정책과 교육연구사가 각각 발제와 토론을 맡았다. 토론회 현장에는 교과서를 펴내는 출판사 담당자를 비롯해 현직 교사들이 자리를 채워 큰 관심을 보였다.
인권위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단계적(2017~2020년)으로 초?중등 교과서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2017년에는 초등학교 1·2학년 교과서를 검토했고, 지난해에는 초등학교 3·4학년을 비롯해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모니터링했다.
분석 대상 교과서는 초등 국어 3?4학년(12권), 초등 도덕 3?4학년(2권), 초등 사회 3?4학년(4권), 수학 3?4학년(8권), 과학 3·4학년(8권), 중학교 도덕(6권), 중학교 사회(6권), 통합사회(3권) 등 전체 49권이다. 단원별로는 초등학교 4학년 도덕 ‘함께 꿈꾸는 무지개 세상’, 초등학교 3~4학년 사회 ‘다양한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 중학교 2학년 사회 ‘인권과 헌법’ 등 교육과정 속에서 상호존중과 인권 이슈를 다룬 영역이 주를 이뤘다.
구정화 교수 연구팀이 교과서 모니터링 연구에 사용한 분석틀은 민주시민 양성과 관련돼 있다. 우리 사회 안팎의 사회적 소수자나 특정 집단이 배제되지 않을 것, 그들의 모습이 다양하고 균형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비롯해 연령·성별·장애·직업·다문화 배경 등에 대한 비하나 왜곡, 차별 등이 개입된 표현을 사용했는가 등을 분석틀로 적용했다.
초등학교 <사회 3-2>(그림 오른쪽), <도덕 4> 교과서에는 학생의 일상 생활을 고려한 인권 교육, 인간존중의 가치와 태도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장애, 나이, 성별을 비롯해 이주민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없애기 위한 교과 활동 내용이 실려 있다.
■ 공교육 12년 동안 보는 ‘경전’
학교 현장에서 교과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교육 내용을 가이드 해주는 참고 교재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실제 대부분의 교실에서는 교과서를 경전처럼 사용한다. 그만큼 교과서가 교육현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이야기다.
이기규 교사는 “대부분 학교에서 교과서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가르친다”며 “그렇기에 인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포함되지 않도록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교과서가 아이들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교과서에는 성 역할과 다문화 가정,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심어주는 등 인권 침해 요소가 곳곳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 교과서인 초등 도덕책의 경우 사회에 도움을 주는 ‘훌륭한 사람’은 남성 위인인 경우가 많았다. 반면 신사임당 등 여성 위인이 등장할 때의 묘사 방식은 해당 인물의 업적이나 결과물보다 ‘아름다움, 모성’에 집중돼 있었다.
■ 다문화 시대의 교과서는?
교과서에 다문화 배경을 가진 학생을 과목별로 고르게 배치해야 하며, 교실 구석에 서 있는 주변부 인물로만 다루기보다는 학습활동의 중심인물로 묘사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일부 교과서에는 다문화 배경을 가진 학생이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기도 했다. 교과서에 외국인을 등장시킬 경우에 백인뿐 아니라 아시아계 및 타인종도 고르게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도 권고했다.
이런 권고가 나온 배경에는 우리나라가 명백한 다문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한국에는 초·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다문화 학생이 10만명에 이른다. 매년 1만명씩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있는 대동초등학교의 경우 신입생 72명 모두가 다문화 학생이었다. 한데 교과서가 다문화 학생의 존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거나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구정화 교수는 지적했다.
경기도 외국인 인권지원센터의 2016년 인종차별 실태 모니터링 조사를 보면, 학교·학원 등 교육시설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많이 일어났다. ‘반차별’ 학습이 이뤄져야 할 교육 공간에서 인권 침해가 빈번하다는 이야기다. 차별 행태는 주로 무시·비하·모욕·혐오 등으로 나타났다. 공교육 현장에서 다문화 배경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유독 단일 민족을 강조하는 한국 교육이 다른 인종에 대한 배타성, 경계심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근거한 교과서 편찬이 시급하다.
흑인을 ‘불쌍한 사람들’로 묘사하거나 일방적 구호의 대상으로만 그린 교과서 사진도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기규 교사는 “교과서 검토 기준은 아니지만 영국 시민단체 스코프에서 제시한 ‘평등한 어린이책 집필 기준’을 참고할 필요도 있다”고 설명했다. 해당 집필 기준에는 △일방적으로 불쌍한 존재, 초현실적 영웅은 안 됨 △전형적인 해피엔딩 구조 지양 △개인의 변화가 아닌 사회적 변화, 소수자의 꿈과 희망 표현 △의도 없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소수자 등이 있다.
■ 교사의 인권 감수성이 가장 중요해
인권 친화적 교과서는 펴낸 뒤가 더 중요하다. 교육 현장에 교과 내용을 제대로 적용하려면 교사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이은진 교사는 “지속적인 교사 교육을 전제해야 한다”며 “아무리 잘 만들어진 교과서라도 교사 본인의 인권 감수성이 낮으면 오히려 반인권적 수업이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교사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가운데 ‘국어 교과서 제시글 속에서 이주여성을 무기력하고 불쌍한 존재로만 묘사해서 불편하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일부 교사들이 ‘그냥 넘어가도 될 부분을 굳이 문제 삼는다’는 식으로 반응하기도 했다.
민주시민의 인권 감수성은 ‘불편함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한다. 이 교사는 “교사의 인권 의식이 빈약할 경우, 오히려 교과서의 인권적 지향점을 비꼬거나 조롱하는 형태의 수업이 이뤄지기도 한다”며 “실제 ‘그림 한 컷 가지고 그렇게 예민하게 굴면 안 된다’는 등 차별적 장면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지는 교육이 진행되기도 한다”고 강조했다.
글·사진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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