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왕용 광양백운고등학교 사서교사, <학교도서관 활용 수업: 중·고등> 공저자
책을 매개로 학생들의 진로 관련 수업을 배정받은 적이 있습니다. 고민이 됐지요. 책만 쳐다보면 잠이 온다는 친구가 많았는데, 진로까지 덧붙이니 막막했습니다. 사실 중학생들의 진로는 막연하기도 하고, 허황된 모습이 있기에 어렵다는 생각이 먼저였습니다. 진로가 명확하지 않으니 수업이 필요하겠다는 당연한 일로 왜 며칠을 고민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기만 합니다.
학생들의 진로 인식 수준과 독서 상황에 따라 수업을 설계하려고 했습니다. 진로 인식 수준이 아주 낮은 단계에서 진로에 대한 뚜렷한 미래 계획을 세우는 일보다 ‘바람직한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 그 바탕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민과 수업 준비를 통해서 알게 된 ‘메모로(MEMORO) 프로젝트’(이하 메모로)가 수업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비영리 프로젝트인 메모로는 60살 이상 어르신의 옛 기억을 영상 또는 음성으로 업로드하는 것으로 누구나 참여 가능합니다. memoro는 라틴어로 ‘생각나게 하다, 일깨우다, 이야기하다, 기억해두다’라는 뜻으로, 프로젝트는 이 뜻을 모두 반영해 진행합니다.
메모로를 중심으로 15차시 진로 수업을 했지요. 그때 함께 자유학기제 연구회를 진행했던 교감 선생님께서 묻더군요. “왜 하필 60대인가?”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황혼의 반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 학생들에게 모범답안을 제시해주는 것보다 도서관처럼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수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또한 진로를 수립하고 계획하는 일보다 바람직한 삶이라는 가치관 수립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어요.”
15차시의 수업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성격 유형 검사를 통해 모둠을 정하고, 모둠원끼리 진로 관련 독서를 통해 질문을 만듭니다. 질문은 미래의 나에게도, 60대 이상의 어르신에게도 함께 할 수 있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자신이 꿈꾸는 진로의 길에서 이미 은퇴하신 어르신 인터뷰 영상을 찍을 때 이 질문을 활용합니다. 이미 자신의 꿈길을 걸어본 어르신들을 찾아 소통하는 시간은 그분들의 삶을 통해서 학생들의 삶과 꿈을 점검해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어르신에게 했던 질문은 다시 본인에게 해봄으로써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질문에 직면합니다. 어르신이 했던 답변을 100%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답변을 바탕으로 나만의 생각을 확고히 하게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50년 뒤의 자신이 되어 자신이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해보는 시간과 발표해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28개의 모둠에서 16분의 어르신을 만나 뵈었습니다. 60대 이상, 자신의 꿈과 연결된,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어르신을 찾는 일이 참 어려웠습니다. 전남 순천시의 복지관 세 곳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교감 선생님도 수업에 참여해 도와주셨습니다.
어르신들의 연락처를 어렵게 구해도 어려움은 계속됐습니다. 치킨 배달을 할 때에도 부끄러움이 많아 직접 전화통화를 하지 못한다는 친구는 대본을 쓴 뒤 전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약속을 잡고 친구들과 함께 인터뷰이를 찾아가는 일도 중학교 1학년에게는 색다른 경험이었나 봅니다. 인터뷰어로서 대화를 리드하지 못해 2시간 넘게 강의를 듣고 온 친구도 있었고, 카페에서 맛있는 음료를 사주셔서 너무 행복했다는 친구들도 있었지요. 50㎞ 떨어진 곳까지 친구와 직접 찾아가 뵙고 삶의 가치를 ‘행복’과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온 친구도 있었습니다. 음악가를 꿈꾸던 친구는 은퇴하신 음악 선생님에게 하모니카를 배우게 되는 뜻밖의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
수업의 최종 목표는 학생이 ‘메모리 시커’가 되어 메모로 누리집에 모둠별로 인터뷰 영상을 업로드하는 일이었습니다. 영상 촬영이나 편집 등의 교육을 한 시간 진행했지만, 당시에는 시골 학교의 특성상 영상 작업에 서툰 친구들이 많아 업로드할 정도의 결과물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치 측면에서 수업의 최종 목표는 도달했다는 생각입니다. 모두가 인터뷰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과정에 충실했고, 그 흐름 속에서 바람직한 삶에 대해 생각해본 뒤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는 일로 그득한 교실이었으니까요. 한 학생의 소감을 남겨봅니다.
“중학교 1학년인 우리에게 시간을 내어주시고, 인생, 직업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동했다. 이야기도 좋았지만 이야기 듣는 내내 그분의 진심이 느껴졌다. 딸기주스도 감사했다. 저도 그분처럼 주변을 둘러보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왕용 광양백운고등학교 사서교사, <학교도서관 활용 수업: 중·고등> 공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