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용샘의 학교도서관에서 생긴 일
학기 초가 되면 주변 학교의 선생님이나, 만난 적은 없지만 학교도서관에 관심 많은 분들이 종종 필독도서 목록을 요청하십니다. 제주도에 계신 선생님께서도 전자우편으로 문의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매번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저에게는 필독도서 목록이 없기 때문이지요.
예전에는 필독도서 목록이 있었습니다. 한데 최근에는 목록을 만들지도 않고 만들 생각도 없습니다. 사실 저는 특정한 책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데는 그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책이 나의 삶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책의 인물이 자신의 원수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 개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제 생각만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책이 나오는 상황에서, 선택이라는 어려움에 빠진 친구들에게는 필독도서가 도움이 될 테니까요. ‘청소년기에 꼭 읽어야만 하는 책’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율 독서 시대에 필독도서 목록은, 어쩌면 교사의 불필요한 개입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학생 스스로 학교도서관에서 책을 접한 뒤 고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지도하는 편이 더 좋습니다.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는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게 낫고,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보다는 바다를 사랑하게 만들라고 했던가요? 물론 학교 현장에서는 교육 과정상 필독도서가 큰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서 교사인 저는 학생들이 도서관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기 초가 되면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학교도서관으로 초대합니다. 반별로 도서관에 초대한 뒤 그 공간을 서성이게 하지요. 책 향기 폴폴 나는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읽고 싶은 책 목록을 직접 만들게 합니다. 학생들은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도서관을 자유롭게 거닐며 책을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합니다. 마냥 장난꾸러기 같던 아이들도 이때만은 신중한 사서의 눈빛을 보입니다. 3∼5권 정도의 책을 고르면 그 책이 자신만의 추천도서가 되는 겁니다. 간단한 책 평가서(이하 평가서)와 주머니에 넣을 필기구만 있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평가서에 따라 선택한 책을 읽다 보면 그 한권을 뿌리 삼아 더 읽고 싶은 책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럼 추천의 추천이 되는 것이지요. 저는 필독도서 목록을 요청하시는 선생님들께 아래와 같은 답장을 보냅니다.
아이들의 감성을 자극하면서도 민주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자랄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는 책, 남을 배려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책, 인간 사이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책, 새로운 시선을 줄 수 있는 책 목록을 담고 싶은 마음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저는 몇가지 이유로 필독도서 목록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첫째, 제가 모두 읽어보지 않고는 목록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읽지 않은 채 필독도서 목록을 만든다면 학생들에게 어설픈 간섭을 하게 되는 꼴입니다. 둘째, 세상 그 어디에도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은 없습니다. ‘필독’이라는 말이 시대에 맞지 않게 강압적이고 학생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셋째, 학생들이 스스로 책을 고를 수 있는 힘을 길러줘야 하기 때문이지요.
수업 시간에 학교도서관에 모여 학생들에게 기회를 준다면 아이들 스스로 자신만의 추천도서 목록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학생들을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수업 시간에 활용할 수 있는 책 평가서 양식을 함께 보내봅니다. 봄바람 살랑이고, 매화가 흩날리는 날을 기대하면서 답장을 보냅니다.
올해는 우리 학생들의 간단한 평가서를 모아 내년 후배들에게 보여줄 생각입니다. 책을 보는 다른 사람의 관점을 소개해주는 겁니다. 기성세대, 어른의 시각이 아닌 또래 세대의 관점이 되겠지요? 학교도서관 곳곳에 평가서가 가득하길 기대하며 3월 새 학기를 준비해봅니다.
황왕용 광양백운고등학교 사서 교사, <학교도서관 활용 수업: 중·고등>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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