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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괜찮아, 나도 그래’…그림책에서 꺼내본 한마디 위로

등록 2019-01-01 20:03수정 2019-01-01 20:12

왕용샘의 학교도서관에서 생긴 일
지난 2017년 일하던 중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감정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감정 글쓰기’란 외로움, 즐거움, 서운함 등 다양한 감정 열쇳말을 활용해 학생들이 짧은 한 편의 글을 완성해보는 수업을 말합니다.

수업을 시작하면 교사인 제가 먼저 학교도서관에서 ‘스토리텔링’을 합니다. ‘선생님은 너희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상황에서 가끔 슬퍼지기도 한다’는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자기 고백을 하게 되지요. 감정 열쇳말은 제가 정하거나,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학생들 스스로 정하게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하얀 종이를 나눠준 뒤 아무런 형식 없이, 솔직함을 담아 글을 써보라고 했습니다. ‘하루가 길다’, ‘감추다’, ‘개의치 않다’, ‘몰아세우다’, ‘꿈인지 생시인지’ 등 수십 개의 감정 열쇳말을 가지고 글쓰기를 진행했지요. 어딘지 모르게 특별한 글이 상을 받고 멋스러운 글이 인정받는 현실이지만, 재능을 뛰어넘는 ‘솔직한 글’을 써봄으로써 글이 가지는 치유의 힘을 느껴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몇몇 친구들이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학교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동아리 수업, 먼저 쓰는 사람은 먼저 하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업 25분 만에 글을 제출하고 나간 친구가 생겼습니다. 출석, 스토리텔링 등 시간을 빼면 10분 만에 글을 쓴 것입니다. “솔직하게 쓴 글이야?”라고 물으니 “네”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대로 인정해줬습니다. 감정 글쓰기는 글의 수준을 떠나, 그저 솔직하면 되는 글이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몇 번의 수업을 반복해보니 학생들은 1시간30분이 지나도 글을 마무리하지 못했다며 저의 퇴근 시간을 늦췄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6개월 동안 끌어온 수업을 엮었더니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자신이 작가로 참여한 <괜찮아, 나도 그래>라는 책을 보물처럼 여겼습니다. 책을 엮는 과정에서 ‘울보 선생’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솔직한 글을 주고받다 생긴 작은 훈장이지요.

감정 글쓰기 수업 중 마음 쓰이는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무릎 딱지>라는 그림책을 읽고 ‘마음이 아프다’는 감정 열쇳말을 꺼내 글을 쓰기 시작한 학생입니다. 그 친구는 긴 글을 쓰고 지우고를 몇 번이고 반복하더니 짧은 글 하나를 남겨놓았습니다. 세월호 희생자분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돌아가셔서 마음이 아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그 친구가 썼던 내용은 위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솔직한 마음은 지우개로 빡빡 밀어 지워버렸습니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던 모양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지워버린 내용은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다는 내용, 그리고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딸에게는 너무 마음 아픈 일이라는 점, <무릎 딱지>에서처럼 가슴에 움푹 들어간 곳에 엄마가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날 그의 책상에는 지우개 가루가 제 손바닥만큼이나 쌓여 있었습니다. 지우개 가루를 치우면서 이 수업을 지속해도 되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 친구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든 의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친구는 다음 시간에도 나와 글을 썼습니다. 따로 불러서 물었습니다. “○○아, 글 쓰는 게 재미없지 않아?”, “아니오. 생각보다 재미있어요. 잘 쓰지 않아도 되고, 썼다 지워도 되니까요.”

지난 2017년 4월부터 시작한 감정 글쓰기 수업은 여름방학이 지나 그해 9월이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그 친구는 어머니와의 추억을 글로 풀어낼 정도로 솔직해졌습니다. 그리고 2학기가 시작할 무렵 친척이 있는 다른 나라로 전학을 갔지요. 11월에 나온 책은 아버지를 통해 전달됐습니다. 여전히 안부를 주고받으며 살고 있지요. 학교 축제 무대 한가운데서 노래를 부르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린다고 합니다.

감정 글쓰기 수업으로 용기를 내어, 괴물 같다고 여긴 엄마와 관계 회복에 나선 친구도 생겼고, 친구들이 무섭다는 내용으로 글을 쓴 친구는 이제는 많은 친구를 이끄는 리더가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감정 글쓰기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다른 지역 고등학교로 떠나버린 부족한 선생에게, 선생님이 계신 학교로 진학하겠다는 친구들을 보며 솔직한 글쓰기의 힘을 조금씩 믿어봅니다.

황왕용 광양백운고등학교 사서교사, <학교도서관 활용 수업: 중·고등>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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