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28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열린 ‘2018 별 프레네 페다고지 세미나’에서 피에르 라피트 파리제8대학 교육문화연구소 연구교수가 ‘제도적 교육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흔히 교육 3주체를 학생·학부모·교사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들이 교육의 실질적 주체일까?
우리나라에는 교육기본법과 초중등교육법이 있다. 정성식 교사(전북 익산시 동남초)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교육기본법에서 주어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24번, 교육부장관이 2번, 학교의 장이 1번, 교직원이 1번, 학생이 2번, 학부모가 1번 언급된다. 목적어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교육부장관, 학교의 장은 한 번도 등장 안 한다. 교직원은 목적어로 2번, 학생은 23번 등장한다. 학부모는 없다.
초중등교육법은 더 심하다. 교육부장관이 주어로 36번, 학교의 장이 30번, 교사가 1번 등장하고, 학생·학부모·교직원은 제로다. 목적어로 학생은 78번, 교사는 27번, 학부모는 3번, 교직원은 8번 나온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교육부 장관, 학교의 장은 목적어로 한 번도 안 나온다. 주어는 행위 주체, 목적어는 행위 대상이다. 법조문이 현실을 100% 반영하는 건 아니지만 한국의 ‘교육 3주체’는 사실상 ‘교육 3대상’이다.
정 교사의 이 같은 조사 결과는 지난 7월28일 열린 ‘2018 별 프레네 페다고지 세미나’에서 발표됐다. 이날 세미나는 대안학교 ‘성장학교 별’이 주최했다. ‘관계와 치유를 위한 새로운 희망의 학교’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토론해보기 위해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는 피에르 라피트 파리제8대학 교육문화연구소 연구교수, 파트리시 바쿠 아프렌학교(교사양성기관) 교장 등이 발표자로 참석했다.
라피트 교수는 프랑스의 ‘제도적 교육학’(협력적 교육학)에 대해 소개했다. 제도적 교육학은 프랑스 교육가 셀레스탱 프레네(1896~1966)의 ‘프레네 교육학’을 계승·발전한 것이다. 라피트 교수는 “프레네 교육학, 제도적 교육학의 핵심은 교실을 기존 지식체계의 재생산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을 이야기하고 고민하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프레네 교육학은 ‘자연학습교수법’과 ‘협력적 학습’이 두 개 축이다. 자연학습교수법이란 아이들을 자연에 그냥 던져놓자는 게 아니라 학생들에게 새로운 걸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수업에서 의미를 찾도록 하자는 교수법이다.
■ “점수 매기기는 의문 제기할 수 없게 만들어”
그는 “예를 들면 수학과 미술수업을 결합할 수 있다. 벽에 물감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 보호막을 설치해야 한다면 막의 면적을 계산하게 한다”며 “아무런 목적 없이, 시키니까 계산하는 게 아니라 계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협력적 학습’이란 학생들이 수동적으로 활동하는 게 아니라 토론을 통해 스스로 역할을 분담하고 학생위원회 등을 통해서 협업을 끌어내는 걸 의미한다.
그는 “학생들은 투표를 통해 단체 의사결정을 한다. 가장 어린 학생들, 취약한 학생들 목소리까지 반드시 잘 들어주는 게 중요하다”며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대의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참여민주주의를 경험한다. 권력을 학생대표나 교사에게 이양하는 게 아니라 서로 동등하게 나누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제도나 규율을 일방적으로 강요받지 않고 스스로 만든 규율과 제도를 지킴으로써 되레 개인은 성장한다”고 부연했다.
파트리시 바쿠 교장은 프랑스 남부 칼렌드라타 학교에 대해 소개했다. 이 학교는 40년 전부터 운영 중인데 프레네 교육학과 제도적 교육학을 현장에서 구현하고 있다. 그는 “교육에는 2가지 축이 있다. 첫 번째는 배우고, 생각하고, 남들과 함께 나누는 것, 두 번째는 책임지는 것”이라며 “점수를 매겨 평가하는 건 2개의 축에 위배된다. 아이들을 맹목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평가 방식이다. 점수를 매기면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두 프랑스 발표자의 말은 학생과 학부모·교사들은 학교 안에서 협력적 관계를 맺어야 하고, 학교는 기존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삶과 어울린 장소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상처를 드러내고 서로 위로받으며 치유도 하게 된다.
우리와 제도와 문화가 다른 프랑스의 교육학을 한국에 적용할 수 있을까? 정성식 교사는 “제도적 교육학에서 말하는 것 가운데 한국에서 적용 가능한 게 있다면 학교생활협약 등 일부 학교자치를 들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 제도적 교육학은 학교 구성원들의 약속이 중요하다. 우리학교의 경우 아이들이 생활협약을 정해 실천해나가고 있다”며 그가 재직중인 전북 익산시 동남초
사례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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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어느 정도 할지 학생들 스스로 정해
동남초는 16개 학급, 전교생 430명으로 이뤄진 혁신학교다. 요즘 초등학교 고학년 여학생들은 화장을 한다. 화장은 표현의 자유 영역이므로 개입해선 안 될까? 아니면 학생답지 않으므로 규제해야 할까? 이 학교 5~6학년 아이들은 강당에 모여 이 주제로 회의를 했고 화장을 ‘표현의 자유’로 인정하되 남에게 과하다는 인상은 주지 않기로 약속을 정했다. 예를 들면 아이섀도는 허용하지만 속눈썹 화장까지는 안 된다는 등이다.
정 교사는 “학칙에 세세한 것들을 담을 수 없으니까 어디까지 허용할지 여부를 생활협약으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 제도적 교육학에서 의도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학생들 스스로 규율을 정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
강원도 횡성의 공립형 대안학교 현천고도 학생과 교사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체회의를 통해 교복·화장·두발·염색 등에 관해 규칙을 정한다. 현천고는 지난 2015년 개교했고 9개 학급 135명이 재학 중이다.
이 학교는 공동체회의에서 정한 약속을 어겼을 경우 ‘책임수행’을 한다. 책임수행이란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걸 스스로 결정하고 수행한다는 뜻이다. 일반학교는 규칙 위반 학생 혼자 책임을 져야 하지만 현천고는 교사와 함께 수행한다.
예를 들어 흡연 안 하기로 한 약속을 어겼을 경우, 첫 번째는 금연교육, 두 번째는 노작(노동작업, 밭일 같은 거 하기), 세 번째는 교사와 함께 20㎞ 걷기를 ‘책임수행’ 한다.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므로 아침 8시30분까지는 퇴실해야 한다. 한데 1년에 3번 이상 지각 퇴실을 할 경우 집에서 3일을 통학하기로 공동체 약속을 정했다.
박경화 현천고 교장은 “머리 염색은 자유다. 한데 염색이 자유화되니까 되레 검정색 머리가 더 늘어났다”며 “나중에 언제든 염색할 수 있으니까 굳이 지금 노란색으로 물들이지 않겠다는 거다. 확 풀어놓으니까 되레 (방종이 아니라) 자율성이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성장학교 별’ 김현수 교장은 “학칙은 겉으로 보이는 학생의 모습만 관심 가질 뿐이다. 외형적인 것만 자꾸 지적하다 보니 교사와 학생들의 관계가 되레 틀어진다”고 지적했다. 김 교장은 “나는 화장이나 머리 염색 때문에 교육이 좌우된다고 보지 않는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는 건 기성세대가 강요한 제도”라며 “학생과 교직원 스스로 제도를 만들고 위에서 강요하는 억압을 없앤다면 그것 자체가 제도적 교육학의 취지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태경 <함께하는 교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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