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26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한국난독증협회, 한국학습장애학회 등 회원들이 ’수능 시험 시간 연장’ 등 난독증 학생들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줄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 김태경 기자
톰 크루즈, 윈스턴 처칠, 아인슈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공통점은?
예술가? 처칠은 정치인이고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다. 유명한 사람? 너무나 당연해서 굳이 질문할 필요가 없다. 지능 지수가 높다? 맞는 말인 듯하다.
그러나 질문이 애초 의도했던 답은 ‘네 사람 모두 난독증이 있다’는 거다. 톰 크루즈는 7살 때 난독증 진단을 받았다. 그는 읽거나 쓰는 것은 물론 발음도 정확히 하지 않았다. 처음 배우 생활을 시작할 때는 상대 배우가 읽어 주는 대본을 통째로 외웠고, 남들보다 5배는 더 노력했다고 한다. 그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톰 크루즈는 오늘날 세계적인 배우가 됐다.
만약 이들한테 글 읽기 장애를 극복할 시도 자체가 봉쇄됐다면 큰 인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데 글 읽는 시간이 보통 사람보다 2~3배 걸리는 난독증 학생이 수능 시험을 다른 학생과 똑같은 시간 안에 봐야 한다면? 수능 점수가 잘 나오기 대단히 힘들다. 대학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한국 현실에서 난독증 학생은 애초부터 공정한 경쟁의 기회가 봉쇄된 셈이다.
지난 7월26일 오전 10시30분 서울시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는 ‘난독증 학생, 장애인 차별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제기’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한국학습장애학회,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언어청각임상학회, 한국언어치료학회, 한국아동청소년상담학회,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좋은교사운동 회원 등 10여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난독증은 학습장애의 하나로 특수교육대상이다. 난독증 학생은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인에 해당한다”며 “그러나 각 시도 교육청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난독증 수험생은 관련법상 ‘수능 시험특별관리대상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시험편리 제공 및 시험시간 연장이 가능하지 않다고 통보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취지로 볼 때 이는 정당한 편의제공 거부이자 차별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며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시험시간 연장과 편의를 제공해 난독증 학생들도 공정하게 실력을 평가 받도록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난독증협회 김중훈 이사는 “보통 아이들이 100개 단어를 읽을 때 1분 걸리는 데 비해 난독증 아이들은 시간이 2~3배 걸린다”며 “빠른 시간 안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하는 한국 수능 시험에서 애초부터 난독증 학생들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능을 주관하는 교육과정평가원 등에 올해 2번 난독증 관련 진정을 했다. 한데 난독증이 겉으로 증상이 확 드러나지 않는 탓인지 편의제공을 해 줄 정도의 중증 장애는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 공부 말고 다른 일 찾아보라는 말 많이 들어
난독증은 뇌 신경회로의 배선, 언어기능·읽기와 관련된 뇌 영역이 보통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석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난독증 학생은 ‘공부 말고 잘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일찍 그만둔다. 열등감과 원망감이 쌓인다”며 “미국 통계를 보면 대학을 졸업한 난독증 학생의 연봉과 취업률은 건강한 학생과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창의성과 혁신의 경쟁 시대인 지금 남들과 다른 관점과 정보처리 방식을 가진 학생, 즉 ‘신경다양성’을 가진 인재를 키우면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난독증 학생은 음악·미술·운동이나 시공간적인 사고방식 또는 3차원적인 인식 능력을 요구하는 분야에서 특출난 자질을 보일 수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끈질기고 혁신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게 난독증 학생들의 특징으로 얘기되기도 한다.
한국학습장애학회 이대식 회장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국내에서 학습장애로 공식 진단받아 특수교육대상자로 선정된 학생은 2040명이다. 한데 여기에는 난산(難算·수학 학습장애), 난서(難書·쓰기 장애), 난독(읽기 장애) 등이 다 섞여 있다. 외국의 사례에 비춰볼 때 학습장애 학생 가운데 80% 정도가 난독증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회장은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난독증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다. 아이가 책을 잘 못 읽거나 장애를 보이면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줄 알고 야단만 치는 경향이 있다”며 “난독증 학생은 지능지수 등 다른 능력은 정상이다. 겉으로 증상이 안 드러나니까 더욱 그런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 전체 학생 가운데 학습장애 비율은 0.03%, 미국은 3%다. 비율로 보면 100배 차이가 난다”며 “여러 변수가 있지만, 서양은 장애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찾아내 치료하려고 하는데 비해 우리는 숨기려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학습장애를 겪는 한국 아이들의 비율은 훨씬 높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중국’을 ‘둥국’ 으로 잘못 알아듣거나, 새로운 단어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 끝말잇기 게임에 참여할 수 없거나, ‘호랑이’는 읽을 수 있어도 ‘랑’을 따로 읽어내지 못한다면 난독증 의심을 해볼 필요가 있다. 주의해야 할 게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학습 내용이 별로 어렵지 않아 외우는 등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공부를 따라잡는다. 다른 이상 증상이 없다고 그대로 방치하면 초등학교 고학년에 가서 학습 내용이 어려워지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
정재석 전문의는 “난독증은 조기에 진단하고 제대로 교육하기만 하면 대학교육을 받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로 좋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난독증협회(http://kdyslexia.org) 누리집에서 ‘난독증에 대하여’ 코너에 들어가면 연령별 난독증 징후, 학부모 가이드, 교사 가이드 등의 자료가 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난독증이 의심되면 소아정신과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 난독증 소견이 나왔다고 해도 특수교육대상자가 되려면 별도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각 시도교육청 산하 교육지원청별로 특수교육지원센터가 있다. 여기에 신청하면 센터는 전문 병원에 다시 의뢰해 정밀 검사를 받게 한 뒤 특수교육대상자로 지정한다.
■ “난독증은 보통 사람과 두뇌가 다른 것”
이날 기자회견에는 김하종 신부(빈첸시오 보르도)도 참석했다. 김 신부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지난 1990년 한국에 와 현재 하루 550명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는 성남 ‘안나의 집’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에서 난독증 관련 협회를 제일 먼저 시작한 이도 김하종 신부다. 그는 지난 2015년 한국에 귀화했다.
김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난독증이 있다. 어머니한테 내려온 유전적인 거다. 그러나 난독증은 교육을 받으면 치료가 가능하다. 나는 동양철학 전공으로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비유하자면 컴퓨터 대부분은 윈도우가 깔려있지만 리눅스가 깔려 있는 경우가 있지 않나? 난독증이 있는 사람의 두뇌에는 윈도우가 아니라 리눅스가 깔려 있는 거다. 리눅스 사용하는 법을 알면 컴퓨터 잘 쓸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난독증이 있는 두뇌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면 잘 사용할 수 있다. 난독증은 보통 사람과 두뇌가 다른 거다. 난독증이 있는 사람의 두뇌는 글씨보다는 이미지로 많이 생각하고 공부한다.”
김태경 <함께하는 교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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