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도 나를 좋아할까. 내가 고백을 하면 나를 받아줄까. 두근거리는 마음은 나 혼자만의 설렘. 아직 ‘우리의 무엇’은 아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귀기로 했다면 오늘부터 1일! 그 아이가 유난히 인기가 많은 아이라면, 어쩐지 경쟁자를 제치고 ‘간택’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잠깐, ‘간택된’ 이 기분은 뭐지?’
사랑이 시작되면 만남이 잦아진다. 자연스레 일상을 촘촘하게 나누는 사이가 되고, 함께 해야 할 의사결정이 많아지고,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협상이 잦아진다. 정말로 사적인 일에도 의견을 낼 수가 있다. ‘옷을 이렇게 입으면 더 멋지지 않을까?’ 참으로 조심스러운 제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밀한 관계에서는 이런 침투가 오고 간다. 상대방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도 있고, 제안을 거절하게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날씨가 어떻고, 유행이 어떻고….’ 하면서 조금 더 설득해보기도 한다. 또 거절했다면 멈춰야 한다. 반걸음 살짝 걸어 들어갔다가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멈칫 멈춰 설 수도 있고, 다시 반걸음 뒤로 물러날 수도 있어야 한다. 제안은 해볼 수 있고 거절은 마땅히 받아들여져야 한다.
연애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놀랍도록 새로운 발견을 안겨주는 사건임이 틀림없지만 안타깝게도 폭력적인 관계로 변질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믿었던 사람,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공격할 때 잘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는 일도 많다. 사랑이라는 이름에 둘러싸인 기대와 작은 것에서부터 서서히 스며든 폭력에, 그것을 지켜보는 친구들과 달리 당사자만이 둔감해져 있다. 지켜보는 친구들이 없다면, 사귀는 사이에서의 폭력은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채로 점점 심각하게 곪게 된다. 신체적 폭력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성적으로 휘두르고 휘둘리는 끔찍한 일이 지속된다. 사랑이 그렇게 어렵다는데 나만은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마음이, 양보와 배려로 관계를 잘 가꾸어보겠다는 다짐이, 외로움을 덜어준 이 관계를 어떻게든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꾹 참게하고, 용인하게 하고, 막연하게 변화할 것이라 믿게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돌이켜 보니 옴짝달싹 못 하는 공포감에 짓눌려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거꾸로 짚어보자. 공포감에 짓눌린 상태가 사랑일까? 두려워하는 것이 사랑일까? 거절할 수 없다면 그것이 사랑일까? 그것이 내가 원했던 사랑일까?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다 내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네가 원하는 것’만큼이나 ‘내가 원하는 것’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나의 불편과 걱정을 나조차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무절제한 왕과 간택된 신하처럼 관계는 한없이 기울어지게 된다. 오직 ‘네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는 것’만 중요한 관계, 연애가 아니라 데이트 폭력이다.
우선 내가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내가 바라는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고 싶은 만큼 ‘내가 원하는 것’도 존중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협상과 조율이 없는 관계는 없다.
문미정(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강사,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우리학교) 지은이(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