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객들이 지난 6월24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공동사진취재단
권희정(상명대부속여고 교사, 숭실대 철학과 겸임교수)
[한겨레 사설] 영욕의 삶 살다 간 JP, 훈장 추서는 신중해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고 영면에 들었다. 정치권에선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공헌한 ‘정치 거목’이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정부도 국민훈장 가운데 최고인 무궁화장 추서 방침을 밝혔다. ‘제이피’(JP)로 더 친숙한 그의 삶은 ‘영원한 2인자’ ‘정치 9단’ ‘처세의 달인’ 등 따라붙던 별칭만큼이나 영욕이 교차했다.
김대중·김영삼 두 전직 대통령과 함께 ‘3김 시대’의 한 축을 맡은 그가 한국 현대사에 남긴 족적은 크다. 1960~70년대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을 통해 산업화를 진전시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지난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디제이피(DJP) 연합’을 통해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내 정치 발전에도 기여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진 2016년에는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나쁜 점만 물려받았다”며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가 드리운 그림자는 훨씬 크고 깊다. 육군 중령이던 1961년 그는 처삼촌 박정희와 5·16 쿠데타를 일으켰다. 4·19 혁명을 짓밟고 인권 유린의 상징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 부장이 됐고, 공화당 창당을 주도해 유신독재의 길을 닦았다. 중앙정보부는 고문·조작, 정치 개입, 김대중 납치사건 등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는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전후로 4년6개월간 총리를 지냈다. 그가 대일 청구권 문제를 졸속 합의한 한-일 국교정상화는 ‘6·3 시위’를 불렀고, 아직도 한-일 관계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1987년 대선에 출마한 그는 이후 지역감정을 이용하고 부추겼다. 특히 1990년 노태우·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한 ‘3당 합당’은 거대 민자당 대 호남에 기반을 둔 평화민주당의 대결 구도를 만들고, ‘영남보수 패권주의’를 굳어지게 했다.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 그는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충청도 핫바지론’으로 지역감정을 노골화하며 충청권 맹주로 정치생명을 이어갔다.
그는 영남보수 패권에 기댄 자유한국당이 사실상 궤멸하고, 부산·울산·경남에서 민주당 광역단체장이 당선되는 등 국민들이 지역주의를 깬 6·13 지방선거 열흘 뒤 별세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인으로 그를 추모하는 것을 탓할 이유는 없다. 다만, 최고 훈장을 추서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정부는 통합의 상징성을 의식했을 수 있다. 하지만 최종 결정에 앞서 ‘반대 청원’ 등에 담긴 비판 여론도 유념하길 바란다.
[중앙일보 사설] 정치권은 JP의 실사구시 정신을 되새겨라
한국 현대 정치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또 하나의 별이 졌다. 지난 주말 타계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파란만장한 한국 정치사를 온몸으로 써낸 ‘풍운의 정치인’이었다. 그런 만큼 그 어떤 정치인보다 영욕과 명암이 교차하는 게 필연일 수밖에 없다. 좋게 보는 사람들에게 그는 전쟁으로 파괴된 척박한 땅에서 산업화와 근대화를 일궈낸 혜안을 가진 정치인이며, 최초의 정권 교체를 주도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에도 기여한 ‘킹 메이커’였다. 하지만 나쁘게 보는 이들에게 그는 군사 쿠데타로 한국의 민주화를 뒤로 돌리고 독재체제를 공고히 했으며, 3당 합당이라는 ‘야합’으로 이 땅의 정당정치를 후퇴시켰고, 권력을 위해 지역주의를 선동함으로써 지역감정의 고질을 식재(植栽)한 ‘처세의 달인’일 뿐이었다.
두 가지 시각 모두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는 것은 곡절과 파란이 많았던 한국 현대사를 용기 있게 마주하고 주도적으로 헤쳐 나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인생과 철학이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점철된 까닭이다. 빛깔 좋은 명분보다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현실을 중시한 그는 야당과 학생운동 세력들로부터 ‘제2의 이완용’이라는 욕을 들으면서도 대일 식민지 배상금 협상을 관철해냈다.
개개인의 피해에 대한 책임을 국가 간 협상으로 말소하는 게 가능한가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때 일본으로부터 받은 8억 달러가 없었더라면 한국의 근대화는 요원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경제적 근대화보다 정치적 민주화에 더 중점을 두었던 다른 신생국들 중에서 선진국의 문턱을 넘은 나라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혜안은 더욱 빛난다. 그의 말대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유와 민주주의도 누릴 수 없다”는 게 진리인 것이다.
이 같은 실사구시 정신과 함께 그는 끝까지 이념이나 진영을 좇아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지 않는 선이 굵은 정치를 했다. 특히 그가 마지막으로 탄생시킨 DJP(DJ+JP) 공동정권은 일부 보수세력의 비난을 받긴 했지만 한국 정치 최초의 수평적 정권의 탄생이자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통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진영과 이념을 초월해 연대·협력할 줄 알았던 김 전 총리의 정치철학은 갈등과 반목이 지배하는 우리 정치 현실에 큰 울림이 될 수 있다. 특히 절체절명의 고사(枯死) 위기에서도 내홍과 불통만 거듭하고 있는 보수정당들에 그렇다. 이념과 진영논리보다는 실용과 민생, 즉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김 전 총리의 실사구시가 진정한 보수의 가치인 것이다.
김 전 총리는 생전에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말했다. 기업인은 노력한 만큼 과실을 얻지만 정치인은 노력해서 얻은 과실을 국민에게 나눠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면 이념과 계파 싸움은 원인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 정치권은 영면한 김 전 총리의 실사구시 정신을 되새겨 분열이 아닌 통합의 정치를 이뤄내야 할 것이다.
[추천 도서]
[키워드로 보는 사설] 국민훈장의 가치 훈장은 국가가 개인의 사회적 공적을 인정하고 그 보상으로 개인의 명예심을 높여줌으로써 공동체 구성원의 행동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동기화하는 수단이다. 훈장이 명예로운 이유는 수여권자인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서훈제도는 정당한 권위, 공정성, 희소성, 보상성의 네 가지 원칙에 의해 효력이 유지된다. 특히 서훈에서 국가가 ‘마땅히 받을 만한’ 사람의 공을 치하할 때 상의 권위도 유지된다. 공과 평가의 과정에서 절차에 문제가 생기면 정당성을 의심받게 되고 상의 권위도 떨어진다. 서훈제도를 통해 사회적으로는 국가에 대한 헌신과 국민통합을, 공동체 조직에는 사기 진작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개인적 측면에서는 자아실현의 만족감을 향상시킬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 사망한 자의 정치적 공과를 검증할 기간으로 10년 이상의 유예기간을 두는 것이 관례다. 역사적 인물의 공과는 정부나 정치권이 독점하기보다 모든 국민이 함께 평가할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번 김종필 전 총리의 훈장 추서를 둘러싼 논란이 새로운 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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