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과학영화에서 불시착하는 우주비행선이 도심을 습격하는 장면. 커다란 비행체가 끔찍한 마찰음을 내며 자신을 향해 돌진하고 있을 때 피할 생각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물체를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주인공은 그의 팔목을 홱 낚아채 위기상황에서 구출한다. 이 주인공처럼 한 발짝 떨어져서 거리를 두고 보면 상황이 보이지만 물체를 가까이서 맞닥뜨린 사람에겐 상황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침해를 받았을 때, 공황상태에 빠지기 전 깊은 심호흡을 하고 금방 합리적인 상태로 돌아와 방어태세를 갖출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게 잘 안될 수도 있다. 머리가 갑자기 작동을 멈추었는지 생각은커녕 어떤 감정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접착제로 발을 붙여놓은 듯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입술조차 움직일 수가 없다. 가위에 눌린 듯 소리도 낼 수 없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얼음!’하고 얼어붙어 버린다.
나 역시 내 앞으로 굴러오는 비행체에 대해서 ‘얼음’이 됐을 법한 인물이라 치자. 그러나 직접적인 공격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나는, 공격에 오롯이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나와는 다르다. 몸과 마음이 더 자유롭다. 움직일 수 있다. 합리적인 상태에 있는 목격자이자 친구로서 ‘땡!’하고 외쳐줄 수 있다. 대신 뛰어들어 정면으로 방어하지 않아도 된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오는 비행체를 직접 내 몸으로 막지 않아도 된다. 아니 막지 않는 게 낫다. 안전한 방법이 아니다. 숨이 막히는 팽팽한 긴장감에 균열을 내는 것으로 연대한다. 땡!
성추행 당하고 있는 다른 학생을 보았을 때, 손목을 잡고 그 상황에서 함께 빠져나오는 것. 신체 위협을 당하는 친구를 보았을 때 경찰에 신고해주는 것. 데이트폭력을 겪고 있는 친구에게 도움받을 수 있는 기관을 알아봐주고 함께 방문해주는 것.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싫다잖아!” 따끔한 말 한마디로 함께 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 나는 목격자이자 정의로운 시민으로서 방어를 도울 수 있다.
길거리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신체적으로 위협하거나 폭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112에 신고하기로 결정했다면 현재 위치를 설명할 준비를 해야 한다. 동네이름, 표지판, 큰 건물, 간판을 둘러본다. 아주 복잡한 내막은 알지 못해도 상관이 없다. 잘잘못에 대해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내가 목격한 사실. 육하원칙에서 ‘왜’를 빼고,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를 목격한 대로만 말하면 된다. 행여 그들이 합의를 하거나 도망을 가더라도 이것은 ‘허위신고’가 아니다.
많은 순간 무력감 속에 빠지고 공포에 짓눌려버리는 사람에게도 남을 돕는다는 것은 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문턱이 낮은 방어행동이다. 지지하는 이웃이 되는 것, 함께 맞서 싸우는 일은 위기에 처한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에게도 말끔한 자신감으로 돌아온다. 공포감에 압도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할 확률이 높은 방어 경험이다.
문미정(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강사,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우리학교) 지은이(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