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서울 ‘청년정치공동체 너머’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나고 있는 <걸 페미니즘> 필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봄다
청소년 인권에 관심 많은 십대 27명이 최근 <걸 페미니즘―청소년인권×여성주의>(도서출판 교육공동체벗)를 펴냈다.
필진 27명은 일반고 및 특성화고 학생부터 대안학교와 탈학교 청소년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부모세대 눈으로 보자면 가출과 일탈을 ‘밥 먹듯’ 해본 이들이지만, 책이 전해주는 속내는 사뭇 진지하다. 책의 목차를 보자. ‘여학생은 성적이 너무 우수하다?’, ‘페미니즘을 만난 남학생’, ‘소녀 착취 산업, 걸 그룹’, ‘여성 청소년이 알바를 하면’ 등 날카롭고 여운이 긴 글들을 담았다.
이 책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소속 십대 활동가들이 ‘페미니즘 인(in) 걸’이라는 제목으로 썼던 글을 비롯해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청소년신문 요즘것들> ‘틴스 페미니즘’ 기고 글, 청소년인권연대 추진단 등에서 활동한 십대들의 글을 모은 것이다.
지난 17일 오후 7시 서울 ‘청년정치공동체 너머’ 사무실에서 필자로 참여한 양지혜씨와 태양(활동명), 봄다(활동명), 느루(활동명)를 만났다.
‘강정 생명평화 대행진’에서 여성주의까지
양지혜씨는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이하 청페모) 활동에 이어 요즘은 ‘청년정치공동체 너머’ 대표를 맡아 청소년인권과 여성주의, 기본소득 등 정책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 느루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22그룹’ 대표로 이주민 인권 활동을 비롯해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세월호 연대체 등에 참여하고 있다. 느루는 청소년 인권 운동을 시작한 뒤 국가와 자본에 의해 ‘밀려나고 탈락한’ 사람들의 활동에까지 관심을 갖게 됐다.
인문계고 ‘모범생’이던 태양은 2015년 강정 생명평화 대행진 참여를 계기로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됐다. 그의 말대로 ‘강정에서 시작해 페미니즘까지 왔다’.
봄다는 중학생이던 2014년부터 학교 안팎에서 ‘성소수자 알리기 활동’을 소소하게 해왔다. 동아리 활동을 하며 학교 복도 벽에 포스터, 설문조사 등 자료를 만들어 퀴어 이슈를 던지는 게 마치 사명처럼 느껴졌다. 쉬는 시간마다 포스터가 붙은 복도에는 ‘작은 광장’이 열렸다. 친구들이 인권을 이야기하고 성소수자 관련 이슈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물수제비 던지듯 작은 파장을 만들어본 경험이 봄다를 ‘더 큰 세상’으로 이끌었다. 그는 커밍아웃 뒤 탈학교 했다.
2016년 5월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어난 여성살인사건. 4명의 필자는 페미니즘 관련 글을 쓰게 된 하나의 계기로 이 사건을 꼽았다. 양지혜씨는 “청페모를 꾸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여성혐오와 여성주의, 학교 안팎의 성교육과 성평등 교육에 관심 갖게 됐다”고 했다.
<걸 페미니즘>은 2차 성징이 시작되는 사춘기 시절부터 ‘몸을 부끄러워하라’고 배우며, 학교에서도 ‘여자다운’ 복장과 외모를 요구받는 양지혜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미디어에서 쏟아내는 각종 다이어트와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압박이 청소년, 특히 십대 여성들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한다.
양씨는 “십대 시절을 지나오며 나를 깎아내리고 부정하면서 사는 방식에 꽤 익숙했다. 중학교 때부터 입기 시작한 교복도 너무 불편했다. 여학생용 조끼는 꽉 끼는 게 기본 스타일이었고, 치마 뒷부분이 엉덩이 살 때문에 붕 뜨는 것도 싫었다”고 했다.
성별에 대한 사회의 이율배반적인 고정관념도 깨보고 싶었다. 여성청소년이 생리를 시작하면 ‘이제 너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숭고한 몸’이라면서도, 막상 생리대는 ‘검은 비닐봉지’에 감추고 다녀야 하는 것으로 교육받았다.
남성청소년의 몽정과 자위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여성청소년은 언제나 욕망이 없(어야 하)는 무성적 존재로 남아야 모두가 ‘안심’했다.
그런 요구와 강요의 주체는 여성청소년 당사자가 아니었다. 양씨는 “‘그럼 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규격에 맞지 않는 내 모습과 나의 몸을 계속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여성청소년은 끊임없이 젠더에 따른 역할을 수행하라고 요구받는 몸이 된 것”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 몸에 대해 자연스레 품평했지만, 나 스스로는 내 몸에 대해 단 하나의 ‘적확한’ 해석도 덧붙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소년인권에서 여성주의로 관심이 확대된 계기이기도 하죠.”
어른들은 왜 ‘사랑하니까’라며 때릴까요?
청페모 운영위원으로 '딸들의 페미니즘' 세미나를 진행한 태양은 ‘가족 안의 폭력을 직시하다’라는 글을 썼다. ‘너를 사랑하니까’라는 명목으로 방을 샅샅이 뒤지며 소리 지르거나 죽일 듯이 방문을 쿵쿵 두드리는 부모. 타투를 하고 싶다는 말에는 이유도 묻지 않고 “살을 다 도려내 버리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귀가가 늦으면 보는 앞에서 티브이를 부쉈고, 그러고는 언제나 “이게 다 널 위해서야. 널 사랑하니까”라고 부모는 말했다.
태양은 “어느 날 문득 너무 혼란스러웠다. 날 사랑한다면 나를 좀 더 소중하게 대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며 “내가 부모에게 솔직해지면 솔직해질수록 나를 함부로 대했다”고 했다. “부모가 원하는 나의 모습은, 내 솔직한 진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일이 너무 숨막혔고요.”
태양은 페미니스트인 벨 훅스의 <올 어바웃 러브>라는 책으로 위안을 얻었다. 가부장제 안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감추고 거짓말을 한다는 벨 훅스의 말에, 지난 19년 동안 가족들과의 생활을 돌아봤다. “폭력은 사랑과 다르다는 것, 사람이 사람을 때리고 폭언을 퍼붓는 게 어떻게 사랑일 수 있겠는가라는 결론을 냈어요. 이때가 십대 시절 청소년인권과 내 안의 여성주의가 만난 순간입니다.”
‘따먹다’ ‘걸레년’ 등 교실 속 혐오표현 심하죠
청소년의 삶에서 성차별과 성별 억압은 함께 작동한다. 여성청소년들은 ‘진정한 여성’이 되라는 사회의 요구 속에서 차별받는다. <걸 페미니즘>은 여성으로 ‘길러진’ 청소년들의 복잡다단한 증언집이기도 하다.
느루는 ‘젠더퀴어’(gender queer) 청소년이다. 젠더퀴어란 여성·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성별 구분만으로 포착할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느루는 중학교 졸업 뒤 ‘남자 고등학교’에 배치되면서 교실 속 만연한 여성혐오적 분위기를 절감했다. ‘따먹다’, ‘걸레년’ 등의 말이 일상 언어였다.
남고에서는 조금이라도 ‘비(非)남성적’인 또래를 가차없이 ‘열외’시켰다. 왕따, 학교폭력부터 교사까지 가세한 언어폭력과 일방적인 무시, ‘사내새끼가’ 등 차별적 발언을 앞세운 압박이 들어왔다. 느루는 “여성혐오 표현과 ‘남성성’을 유지하는 것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느꼈다. 그 분위기에 녹아들지 않으면 ‘사회화하지 못한 남성’으로 내쳐졌다”고 했다.
‘한국 남성’임을 증명하기 위해 여성, 이주노동자, 특정 인종을 비하하며 혐오표현을 배워야 하는 교실 분위기에서 ‘학교는 차별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느루는 “성교육을 굉장히 이성애 중심적으로 진행한다. 태어나면서 선택할 수 없었던 ‘성기 중심’ 성교육”이라며 “더 나아가 여학생들은 출산, 낙태 등의 이야기를 성교육 시간을 통해 들으면서 ‘재생산해야 할 성스러운 몸’으로 교육받는다”고 했다. “낙태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생명권 존중 이슈를 들고 오는 식인데, 이런 부분에서 큰 문제의식을 느꼈습니다. 뱃속 아이는 ‘지우면 안 된다’는 건데, 여기에 여학생들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교육받을 권리, ‘아이를 함께 만든 남자’의 책임 소재와 존재는 쏙 빠져 있는 거죠.”
네 사람은 2016년 출범한 청페모에서 운영위원과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청페모를 통해 각종 세미나와 ‘학교×페미니즘 문화제―이제는 성평등을 배우고 싶다’, ‘딸들의 페미니즘 프로젝트’ 등을 진행했다.
지난 19일에는 마포평생학습관에서 <걸 페미니즘> 관련 북토크를 열었고, 앞으로도 다양한 공간에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현재 청페모는 ‘여성청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노래 만들기―나의 노래는 나의 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여름께 곡이 나올 예정이다.
글·사진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