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나는 보았다. 버스 안이 막 붐비기 시작한 시간. 어떤 여고생이 내리는 문 근처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여고생이 거기 서 있는 것이 내리려던 한 중년 남성에게 방해가 되었나 보다. 버스가 정류장에 서자 좌석에 앉아 있던 그가 여고생을 향해 소리를 크게 내지르고 위협하고는 내려버렸다. ‘확!’ 그리고 욕설 몇 마디.
‘확!’ 하고 위협하는 소리는 너무나 익숙하다. 어디서 들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손을 올려 때리려는 몸짓, 부라린 눈빛, 한 걸음 크게 걸어 들어오며 닿을 만큼 가까워지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 그리고 상대방이 반격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 누가 누구에게 할 수 있는 몸짓과 행동인가. 중년의 남성을, 여고생을 바꾸어서 상상해보면 명확해진다.
위협하며 다가오는 사람이 내 앞에 있다면? 눈을 질끈 감게 된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모로 돌린 몸짓이 저절로 만들어진다. 비명을 지를 때와 비슷한 몸짓이다. 그 몸짓은 마음이 쪼그라들어 대항하지 못할 것 같은 무기력한 몸짓이다. 우리에겐 이런 상상이 익숙하다.
반대로 이런 장면도 있다. ‘확!’ 하고 위협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곧추세운다.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리고 단호하고 엄중하게 “손 내리세요”라고 말한다. 아니 명령한다. 이번엔 위협하던 사람이 생각한다. ‘손이 날아가면 막아낼 것만 같다’, ‘때리면 경찰에 신고하겠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어’ 머릿속이 복잡해질 것이다. 그리고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엄중한 눈빛으로 “욕하지 마세요”, “밀치지 마세요”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소녀들이 있다. 뱃속 깊은 곳에서 만들어 상대방을 향해 묵직하게 밀어내는 소리로 장풍을 쏘듯이 그렇게.
여고생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했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할 수도 있었다. 혹은 버스를 출발시키려던 버스기사를 향해 “기사님, 잠시만요!”라고 중년 남성이 내릴 수 있게 소리쳐 주었을지도 모른다. 실수를 인정하고 살짝 뒤로 물러서서 그에게 필요한 공간을 만들어주었을 수도 있다.
작은 실수에는 작게 대응하는 법이다. 큰 잘못에는 진지하고 엄중하게 반응할 일이다. 중년 남성은 “내립니다”라고 말하면서 주의를 주는 정도로 그쳤을 수도 있고, 내리는 쪽을 조금 막은 것이니 고등학생을 피해 내릴 수도 있었다. “여기 서 있으면 어떡해요?” 하고 불쾌감을 드러내는 방법도 있었다. 왜 신체를 위협하는 과격한 방법까지 썼을까? 왜 욕설을 내뱉어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나이를, 성별을, 덩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비단 중년의 남성뿐이랴.
그날, 다음 정류장을 향하던 버스 안에 있던 승객들이 한두 마디 거들었다. “거 너무 심하네”, “학생 놀랐지요?” 참, 다행이었다. 다른 승객들이 침묵하였다면 안 그래도 날벼락 같은 공격을 받은 터에 모두 한통속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우리들이 보낸 지지와 연대를 잘 받았기를 바란다.
문미정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강사,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우리학교) 지은이(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