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샘과 함께 ‘자기방어훈련’
영화 <옥자>에는 산골 소녀 미자가 산비탈을 서서 미끄러지듯 뛰어내려오는 장면이 있다. 관절들은 모두 적당한 예각을 이루었고, 움직임엔 대담함과 리듬, 일상성이 함께 서려 있다. 무슨 대단하고 복잡한 훈련 과정이 필요했겠는가. 그저 놀다 보면, 경험이 쌓이다 보면 몸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인 것.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골목에는 아이들이 딱 놀기 좋은 ‘핫스팟’이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 그 사이로 들어가 한쪽 벽에는 엉덩이를 대고 다른 쪽 벽에 발바닥을 올린 다음 허벅지에 힘을 빡 주고, 그렇게 앉은 자세로 한 뼘씩 한 뼘씩 위로 올라가곤 했다.
이런 놀이 과정에서 ‘조신한 몸짓’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모험을 통과하고 신명 난 몸통이 온 세상을 향해 뿌듯함을 내뿜을 때 함께 기뻐하고 웃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팔다리를 크게 벌릴 때마다 단호한 금지의 손짓과 눈빛이 되돌아온다면? 이 손짓은 무릎을 탁탁 치면서 다리를 모아 붙이라고 한다. 화들짝 무릎을 모으고 팔을 몸통에 붙이고서 조심조심 조용조용한 몸짓을 하게 된다. 잔잔한 인정과 평화가 피드백되어 돌아오고, 그것이 좋아진다. 한 해 두 해가 가면, 몸은 배꼽을 향해 오그라지듯 움츠리는 모양새를 완성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언어지능이 발달하도록 자극받아왔다. 강아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강아지”라고 처음 말했을 때, 처음 시를 쓰거나 논리적인 주장을 펼쳤을 때, 걸음걸음마다 기다려주고 격려해주는 문화가 있었다.
신체동작지능, ‘몸지능’은 어떨까? 언어지능처럼 누구에게나 적극적인 학습과 경험의 기회가 주어졌던가. 언어 사용을 격려받을 때 언어지능이 발달하듯, 몸지능은 반드시 몸을 쓰는 것을 응원하는 문화가 있을 때 발달한다.
그런데 초등학교 체육시간에 피구라도 할라치면 말 그대로 열정이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소녀들은 얼마 안 가 같이 몸으로 놀아줄 친구가 없어진다. 점심시간 운동장은 ‘자연스럽게’ 소년들 차지다. 산비탈쯤이야 서서 내달리듯 뛰어내려올 수 있던 소녀들. 그들은 반에서 ‘인기’가 없어진다. 땀 냄새는 ‘여자답지 못하다’. 더 넓게 뛰어넘거나 더 세게 움켜쥐고 싶다는 도전의식, 그런 마음 자체가 사라진다. 아이들이 뛰고 잡으며 놀기를 ‘자발적으로’ 싫어하게 될 때까지, 전방위적으로 최선을 다해 막아서는 문화가 있다. 무릎을 모으고 가만가만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문화가 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운동을 싫어하는, 오그라든 몸을 갖게 된 소녀들에게, 이제 와서 놀랍게도 사회가 되묻는다. 여자들은 운동을 싫어하지 않느냐고. “저항하지 그랬어?”라고.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은 이 뻔뻔한 질문을 거부한다. ‘약해져야’ 여성으로 여겨지는 사회를 문제 삼고, 오그라든 몸과 마음을 다른 관점과 방식으로 훈련하며, 기울어져버린 사회를 바꿔 가자는 제안이다.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평등과 안전을 위해서.
문미정(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강사,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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