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교시 페미니즘
5학년 수업을 하면서 굉장히 속상했던 경험이 있다. 책을 읽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감상을 나누는 수업이었는데 제재 글이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기도 했던 권기옥의 전기였다. 교사인 나부터 학급 누리집에 감상을 올렸다. 남자 독립운동가는 많이 가르쳤으면서 정작 여성 독립운동가인 권기옥은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앞으로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썼다. 교사의 글을 참고해 감상을 남기다 보니 비슷한 관점에서 글을 남긴 아이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한 아이는 “여자는 디자이너 같은 일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여자도 비행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썼다.
다음날 아이에게 물었다. 정말 될 수 있다는 걸 몰랐느냐는 내 질문에 “될 수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진짜 여자가 비행사를 하는 건 처음 봤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사실 그랬다.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무엇이건 될 수 있다고 가르쳤지만 텔레비전 등을 통해 아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성에게 허락되는 직업은 굉장히 제한적이었고 그나마도 세상이 만들어둔 외모 기준에 들지 않으면 차지할 수 없었다.
아이의 꿈에 대해 첫번째 지지자가 되어주어야 할 보호자들은 어떤가? 나만 해도 어려서부터 ‘우리 딸은 선생님 하면 좋겠네’라는 말을 매일같이 들어왔다. 정말 나의 적성이 교사에 맞는다고 생각해 그런 말을 했다는 이야기는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여자가 마땅히 해야 할 양육 노동과 가정 내 노동을 병행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권하셨을 것이다. “여성인 너를 위해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한 거다”라는 말은 일견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세심한 조언에 여성이 비혼이나 아이를 낳지 않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정보는 빠져 있다. 재생산을 선택한 여성이 직업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드는 세상이 잘못된 것이고 바뀌어야 한다는 진실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학교 진로교육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양한 직업을 소개하려고 제작한 직업카드조차 성역할 고정관념을 드러낸다. 교과서를 통해 접하게 되는 직업 사진과 삽화는 또 어떤가. 진로체험에서도 여자아이들은 성별을 이유로 시간제로 일할 수 있는 바리스타 같은 직업을 체험해볼 것을 제안받곤 한다. 이쯤 되면 가정, 사회, 학교가 한목소리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셈이다.
지난해부터 여성 직업인들과 만날 때마다 인증샷을 찍고 있다. 다양한 여성들이 다양한 직업군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그렇게 모은 사진이 30장쯤 되는데, 공개할 때마다 아이들의 반응은 제법 뜨겁다. 당연히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남성 직업인의 사진도 함께 공개하는데 이 경우는 직접 찍을 필요 없이 그저 직업명으로 검색만 해도 쉽게 얻을 수 있다. 내가 굳이 찾아 보여주지 않아도 모든 아이들이 다양한 여성 역할모델을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또 제발 성적이 좋은 여자아이들에게 성별을 이유로 ‘선생님을 해라’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른들이 만든 기울어진 세상 때문에 아이들이 체념을 먼저 배워서는 안 된다.
서한솔(서울 상천초등학교 교사, 초등성평등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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