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8일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 회원들이 박문호 박사(가운데 서있는 이)의 강의를 듣고 있다.
“대충 아는 것은 진짜 아는 게 아닙니다. 철저하게 알아야 하고 10초 안에 머릿속에서 핵심 정보를 불러올 수 있어야 진짜입니다. 자! 아르지닌 분자 구조 그려보세요.”
지난 1월28일 오후 5시 서울 서초구 반포동 명궁빌딩 302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반도체 연구원 출신으로 <뇌, 생각의 출현>, <뇌과학의 모든 것> 등의 책으로 유명한 박문호 박사가 열강하고 있었다.
6~7평 되는 강의실은 수강생 40여명으로 꽉 찼다. 20대부터 70대까지의 학생(?)들은 노트를 펼쳐놓고 빼곡하게 필기를 했다. 강남 ‘1타 강사’의 강의를 듣는 수험생, 노량진 공무원시험 준비생들보다 더 진지했다. 더구나 일요일인 이날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온종일 수업을 듣는데도 피곤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미노산 20개의 분자식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1000쪽짜리 대학 생화학 교재 1년 공부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지금은 모든 학문이 모아집니다. 자연과학에서 꼭 암기해야 할 공식·도표 등은 30개입니다. 이 30개는 자연과학의 알파벳입니다. 알파벳 모르면 영어 공부 할 수 없죠? 자연과학의 알파벳을 모르면 학문 융합을 할 수 없습니다.”
심상욱(경희대 철학과 4학년)씨는 “‘박자세’(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에서 뇌과학 등 자연과학을 배우면서 사고의 폭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철학은 인문학의 전형인데 어떻게 자연과학 공부를 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요즘 코딩 교육이 주목받는 등 이공계 지식과 인문학 지식의 장벽이 없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 아니냐”고 답했다.
수강생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의사, 인문학과 교수, 건축학 전공자, 창원에서 전날 상경해 찜질방에서 자고 참가한 일반인…. 한데 중고등학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에는 중고등학생도 있었다고 하는데 상식적으로 대입이 최우선인 한국 현실에서 이들의 참가는 웬만한 각오 없이는 힘들 듯했다.
30년간 과학교사를 했고 2008년 ‘올해의 과학교사상’을 받은 양혜숙씨는 “나도 교단에 섰지만 일선 학교에서 인문학·자연과학 융합 교육은 고사하고 과학만 해도 학생들이 생물, 화학, 물리 등 과목별로 따로 배운다”며 “박자세에서 융합지식을 경험하면서 학교에서도 이런 수업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융복합 지식, 융복합 독서의 중요성은 상식이 됐다. 한데 ‘일단 입시가 우선’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런 생각은 힘을 잃는다. 단적으로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학습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만든 혁신학교의 경우, 초등학교는 주변 아파트 값이 오를 정도로 인기지만 중학교만 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창의적 학습이 좋은지는 알지만 입시가 급한데…”라는 학부모들의 염려 때문이다.
지난 1월28일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 회원들이 박문호 박사의 강의를 들은 뒤 토론을 하고 있다.
■ ‘환율’ ‘오버슈팅’ 등 수능 지문 수험생 당황
그러나 이런 흐름에도 일정 정도 변화가 불가피하게 됐다. 일단 수능에서 비문학 지문의 비중이 늘고 상당한 난이도로 출제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18학년도 수능의 통신시스템 부호화 과정, 환율 오버슈팅 등의 지문이 예다. 추론 능력을 기르지 않았다면 ‘멘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서울 동북고 권영부 교사는 “수능 비문학 지문에 물리학·수학 관련 내용이 나오니까 아이들이 당황한다”고 일선 학교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경제·과학 관련 내용이 수능 비문학 지문으로 나올 때 공정성 때문에 특정 교과서에서 인용할 수 없다”며 “못 봤던 지문이니 학생들이 당황하는 거다. 결국 평소 독서력이 떨어져 있는 게 근본 문제”라고 진단했다.
이번 수능에서 대안학교 출신으로 만점을 받아 화제가 됐던 광주광역시 지혜학교 심지환군은 “1년에 20~3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발췌본·요약본이 아니라 원저자의 책을 독파했다”며 “기억에 남는 책은 <코스모스>(칼 세이건 저),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저) 등”이라고 밝혔다. 그는 “어렵다고 소문난 몇몇 수능 지문은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못 풀 정도는 아니다”라며 “평소 독서를 든든하게 해두면 낯선 지문을 봤을 때 당황하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말했다. 심군은 “독서를 많이 하면 억지로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입에서 자연스럽게 논리가 나온다”며 “융복합 독서, 융복합 지식이 강조되지만 재미 위주의 책만 읽는 게 아니라면 결국 통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심군이 다녔던 지혜학교는 독서세미나 과정이 있다. 많을 때는 30개, 적을 때는 15개 정도를 개설하는데 에리히 프롬, 캐런 암스트롱(영국 출신 유명 종교학자), 노자·장자, 미래학자 등 원저자의 책을 읽는다. 책을 읽고 서로 토론하고 마지막에는 에세이를 쓴다.
독서→토론→글쓰기…. 지식을 체화하는 정통 코스다. 나 홀로 독서보다는 여러 사람과 토론하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깨달을 수 있다. 글쓰기는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역설적으로 지혜학교에서 이런 공부가 가능했던 건 미인가 대안학교이기 때문이다. 이 학교 장동식 교사에 따르면 재학생의 95% 이상이 대학에 진학한다. 장 교사는 “요즘 수능 지문은 어른들이 과거에 봤던 학력고사와 다르다. 난이도도 높고 추론 능력을 요구하는 문제가 많다”며 “독서를 많이 하면 개념어에 익숙해지고 문리가 트이고 이해력이 향상된다. 거기에 토론하고 에세이를 쓰면서 문제의식과 사유가 깊어진다”고 강조했다.
■ 정답 없는 문제 내는 쪽으로 평가 바뀌는 추세
그렇다면 정규 학교에서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지금처럼 답이 있는 문제를 풀게 하는 식으로는 미래 사회에 대비할 수 없다며 서울시·부산시교육청 등이 객관식 시험을 단계적으로 없앨 계획이다. 제주도교육청은 모든 과목을 논술형으로 답해야 하는 인터내셔널 바칼로레아(IB·아이비)를 올해 하반기부터 시범학교에 도입할 계획이다. 특히 주목되는 게 서울시교육청의 움직임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에게 아이비 도입을 위한 용역을 맡겼고 올해 3월 안에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지난 1월3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초
·중
·고등학교 평가에 아이비 도입을 포함한 평가혁신 방안 추진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카이스트·충남교육청·교육과혁신연구소 등이 고2 학생 8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아이비에 나온 역사 문제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전쟁이 사회변화를 가속화시킨다’는 명제에 대해 2가지 이상의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고 본인의 생각을 논해 보시오.
전쟁 관련 연도, 중요 인물 몇 사람, 몇 가지 사건 등만 알아서는 풀 수 없다. 전쟁은 정치·경제·사회·문화·과학 등 모든 변화에 큰 영향을 준다. 2차 세계대전 때 남성들이 징집당해 노동력이 부족하자 여성을 대량으로 경제활동에 투입했고 이에 따라 여성 발언권이 강해졌고 ‘여성 파워’가 등장하는 배경이 됐다는 이론이 있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전쟁 때 아테네는 병역의무가 없던 무산계급을 선원으로 동원해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했다. 이들의 발언권이 세졌고, 무산계급을 바탕으로 페리클레스는 고전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다. 전쟁이라는 소재 하나만 가지고도 아이비에서는 융복합 지식을 동원해야 하는 것이다.
글·사진 김태경 <함께하는 교육> 기자
ktk7000@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