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 노조원들이 지난 1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법부 블랙리스트 전면 재조사와 관련자 전원의 형사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권희정(상명대부속여고 교사, 숭실대 철학과 겸임교수)
[한겨레 사설] ‘블랙리스트’ 논란, 대법관도 법 위에 설 수는 없다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비밀 문건들이 공개된 뒤 법원과 언론계 등에서 벌어지는 논란은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한다.
현직 대법관 13명은 23일 간담회를 열어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재판이 “사법부 내외부의 누구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은 사실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면서 언론 보도에 대해 “의심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시했다. 그런데 대법관 13명 중 6명은 재판에 관여도 안 했는데 진상을 어떻게 안다는 것인지 우선 의문이다. 당시 주심 대법관이나 대법원장 등 핵심 구실을 한 당사자들은 이미 퇴임했는데 문건 내용이 사실이 아닌지를 누구에게 확인했다는 것인지도 묻고 싶다. 대법관 회의가 동아리 모임도 아닌데 법관·재판의 독립이 걸린 헌법 위반 사안에 대법관 전체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내걸어도 되는가. 대법관들의 무책임한 처신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일부 보수 언론의 보도 역시 기본적인 언론윤리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물론 문건만으로 권력과의 뒷거래나 법관 사찰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건 내용만 봐도 실제로 실현됐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들은 일제히 ‘블랙리스트는 없었다’며 청와대와 행정처의 부적절한 거래 의혹까지 당연시했다. 법원 내부갈등 문제로 호도하고 거꾸로 대법원 추가조사에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사건의 본말을 뒤집기도 했다.
법원행정처 정책을 비판한 판사를 선별해 명단을 만들고, 뒷조사해 기록하고, 법적 기구인 사법행정위나 판사회의 간부직에서 배제하는 게 전형적인 ‘블랙리스트’ 아닌가. 대통령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건은 법원행정처가 ‘재판부 의중을 파악’해 청와대에 보고해도 된다고 보는 것인가. 법관·재판의 독립은 물론 국민의 공정한 재판 받을 권리를 심각하게 해치는 헌법 위반 사안이 별문제 아니라고 본다면, 그게 정상적인 언론인가.
문유석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는 “문건 자체보다도 우리 사회 일각의 태연자약함이 더 충격적”이라며 ‘우리 사회의 진영 논리는 이 지경에 이른 것인가’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러나 진영이 문제가 아니라 수구보수 일각의 편향된 시각이 문제일 뿐이다. 모든 사안을 좌우로 나누고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하는 기울어진 잣대가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일 뿐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25일 진상 규명에 미온적이던 법원행정처장을 전격 경질하며 정면돌파 의지를 드러냈다. 당시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장·차장 등 관련자들이 앞으로 컴퓨터 개방에 동의하고 진상 규명에 협조할지가 관건이다. 이미 드러난 문건만으로도 직권남용 혐의는 짙다. 김 대법원장은 전·현직 대법원장·대법관이라고 법 위에 설 수는 없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중앙일보 사설] 걱정스러운 대법원장의 ‘인적 쇄신’ 방침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조사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김 대법원장은 “법원 구성원의 충격과 분노” “국민들의 배신감”을 언급하며 추가조사위원회가 이틀 전에 발표한 내용을 사실상 실체적 진실로 인정했다. “법관들의 동향을 파악하거나 성향에 따라 분류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판사 성향 분류 작업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단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 내부에서도 이 위원회가 찾아낸 자료를 ‘성향 분류 리스트’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사법행정위원으로 추천할 후보를 선정하는 데 필요한 기초 자료로 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김 대법원장은 후속 조치로 법원행정처 조직 개편과 인적 쇄신 조치를 제시했다. 법원행정처의 조직과 기능이 확대되면서 권한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는 것은 법조계에서 대체로 동의하는 시각이다. 김 대법원장이 취임 직후 이미 개혁 방침을 밝혔던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인적 쇄신’ 부분이다. 진보 성향 판사들이 주도해 만든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회원들 중심으로 추가조사위원회가 꾸려지자 법원 안팎에서는 법원행정처가 꼬투리 잡힐 만한 내용이 나오면 김 대법원장이 이를 법원 인사에 활용할지 모른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법원의 ‘신(新)주류’를 형성한 이 연구회 소속 판사들이 법원 내 요직으로 대거 진출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김 대법원장은 이 모임 회원이었고, 그가 임명한 법원 인사 책임자(인사총괄심의관)도 이 모임에서 활동해 온 판사다.
다음달에 발표될 법관 정기 인사를 앞두고 뛰어난 법리적 판단과 재판 진행 능력을 보여 온 판사 수십 명이 거취를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사법부에서까지 정치적 성향에 따른 요직 등용과 배척이 이뤄질 것이 우려되는 상황과 무관치 않은 일이어서 걱정스럽다.
[추천 도서]
[키워드로 보는 사설] 법관의 독립과 사법권 독립 우리 헌법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제103조)고 하여 ‘법관의 독립’을 보장하고 있다. 법관의 독립을 둔 까닭은 법관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다. 사법권은 국민이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최후에 기댈 수 있는 권리 보호자이며 갈등 해결자이다. 만약 판사가 승진이나 보직, 근무평정 등에 더 관심이 많다면, 정치적 압력이나 인간관계에 의해 통제된다면, 재정 문제나 사업적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면 ‘헌법과 법률, 그리고 양심에 따라’ 판결하기 어려울 것이다. 판사는 어떠한 외부 지시나 압력으로부터 구속받지 않은 상태일 때 국민의 자유와 인권 보호만을 기준으로 판결할 것이다. 이번 사법부의 ‘판사 뒷조사’ 파문에서도 보았듯이 법관의 독립을 가장 크게 위협한 것은 법원 외부보다 법원 내부의 권력이었다. 한 언론사는 명단 안에 있던 판사들의 인사이동을 전수조사한 결과 대부분이 자격을 갖추고도 희망 보직에 배치받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명단에 없는 판사들도 막대한 권한을 가진 법원행정처와 익명의 거점판사들에 의해 자신의 동향이 보고되어 왔으리라 상상하며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심리적 위축과 부당한 보직 배치는 법관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을 위협할 것이다. 공의에 입각한 판결이 아니라 특정 세력을 위한 판결이 내려질수록 피해는 국민에게, 이득은 부패세력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법관의 독립이 약화될수록 사법부 외부의 권력은 법원행정처와 같은 내부 권력을 통해 재판에 개입하려 할 수 있다. 사법 폐단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
연재사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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