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전남 순천 신흥중학교 도서실에서 황왕용 지도교사(윗줄 왼쪽 여섯째)와 ‘북적북적 동아리’ 학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김지윤 기자
“선생님이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아버지가 타고 다니던 낡은 트럭이 부끄러웠어. 가끔 학교에 태워다 주셨는데, 친구들에게 허름한 트럭 안의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 이렇게 감추고 싶었던 일들이, 나중에서야 별일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
순천 신흥중학교 황왕용 사서교사가 ‘감추다’라는 열쇳말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내자 아이들도 하나씩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엄마가 치킨집을 하세요. 가끔 오래된 치킨배달차로 저를 학교에 데려다주시거든요. 마음속으로는 ‘창피해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학교 앞에 오면 ‘엄마, 저쪽 끝에서 내려주세요’라고 한 적이 있어요.” 2학년 최예슬양의 말이다. 같은 학년 김민찬군도 ‘감추다’라는 글감에 말을 보탰다. “학교 행사에 부모님 오시는 게 싫어서 가정통신문을 안 가져간 적이 있어요. 그땐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제 와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두렵다’ ‘감추다’…함께 글감 정해서
각자 이야기 털어놓는 글쓰기 시간
선생님 먼저 ‘내 이야기’ 들려주며 시작
‘너도 그런 마음 느껴봤구나’ 공감하며
열다섯살 상처 함께 보듬어보기도
독서카드 통해 친구한테 책 추천도 해
자기감정 살피는 힘 키워주는 독서활동
순천 신흥중 독서부 ‘북적북적 동아리’(이하 북적북적)와 황 교사가 최근 펴낸 <괜찮아, 나도 그래>의 일부 내용이다. 이 책은 열다섯살의 감정과 생활 모습을 하나하나 담고 있다.
책의 목차도 독특하다. ‘하루가 길다’, ‘두렵다’, ‘개의치 않다’, ‘몰아세우다’ 등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을 글감이자 목차로 정해 이야기를 풀어냈다. 책의 뼈대가 된 건 황 교사가 이끄는 동아리 북적북적의 ‘감정 글쓰기 수업’이었다. 감정 글쓰기 수업이란 학생들이 느끼는 감정을 열쇳말로 제시해, 자신의 이야기를 꾸밈없이 글로 써보는 것을 말한다. 1단계 글감 선정과 스토리텔링, 2단계 감정 글쓰기, 3단계 독서카드 수정하기 등으로 진행한다. 황 교사는 “학생들이 자기감정을 이해하고, 나아가 다른 친구들과 가족 등 타인의 감정에 공감해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대 친구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라고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매주 금요일 7교시, 도서실에 모여 책 읽고 한 문단씩 쓰다 보니 아이들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공통 열쇳말 정한 뒤 글로 옮긴 ‘내 마음’
감정 글쓰기 수업 1단계인 ‘글감 선정과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교사의 솔직함이다. 황 교사는 아이들에게 흰 종이와 연필을 주고 무작정 써보라고 권하는 건 책과 글쓰기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는 지름길이라 생각했다.
교사가 먼저 ‘요즘 힘든 일 있니?’, ‘마음만 굴뚝같다’, ‘그립다’ 등 글감으로 자기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를 스토리텔링이라고 한다. 위에 나온 ‘아버지의 트럭’ 사연도 황 교사가 아이들한테 들려준 스토리텔링 가운데 하나. 황 교사는 “선생이 먼저 자신의 경험을 가감 없이 진솔하게 들려주면 아이들도 어느새 끄덕이며 편안하게 자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며 “스토리텔링은 글을 말로 보여주는 과정이다. 스스로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듯 쓰면 되는 게 바로 글쓰기라는 것을 알려줄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교사가 글감을 정해주다가, 아이들이 마음을 글로 옮겨보는 활동에 익숙해질 무렵부터 모둠 활동을 통해 글감을 직접 고르게 했다. 이때 그림책을 주로 활용했다. 그림책은 글자 수가 적고 다양한 색깔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어 특정 감정을 상상하며 대화를 나누기 좋다. 3학년 김설아양은 “모둠별로 글감을 1~2개 골라 칠판에 적는다. 다 같이 토론하며 글감 하나를 선택해 북적북적만의 공통 열쇳말을 정한 것이다. 우리가 직접 글감을 정한 뒤 선생님의 스토리텔링을 듣고 감정 글쓰기를 시작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글감을 함께 고르고 공통 열쇳말을 정하게 하니 아이들은 ‘남보다 새로운 주제의 글을 써내야 한다’는 부담을 덜 느꼈다. 황 교사는 “한 주제를 놓고 스토리텔링해보면, 평소 성격이 달라 의견 충돌이 있었던 아이들도 ‘저 친구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네’ 하며 위로와 공감을 나누게 된다”고 했다. “공통 열쇳말을 정하면 대화하면서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습니다. ‘감추다’라는 글감 하나만 해도 한 학생은 부끄러움을, 다른 학생은 뾰루지를, 또 누군가는 성적표와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 등을 떠올립니다.”
읽고 쓰며 서로 안부 묻게 된 아이들
감정 글쓰기는 일기와는 조금 다르다. 오늘 일어난 일을 쓰는 게 아니라, 함께 정한 글감과 관련해 목격했던 일, 마음에 남아있는 과거의 일 등을 하나씩 뿌리 내려가며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고 듣고 경험한 대로 정직하게 쓰기, 맞춤법에 신경 쓰면 좋지만 너무 부담 가지지 않기 등 소소하지만 중요한 원칙도 있다. 특히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하여, 어떻게 되었다’ 등 일곱 가지 요소를 밝혀 쓰도록 지도했다. 황 교사는 “보통 아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힘들어하는데, 이 일곱 가지 요소를 표로 만들어 순서대로 배치하면 훨씬 수월하게 글을 써낸다”고 했다.
함께 2단계까지 마치면, 아이들은 친구들과 둘러앉아 서로 쓴 글을 차근차근 읽어본다. 3학년 김정우군은 “친구들과 팀을 이뤄 ‘랩 대회’에 나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했던 경험을 쓴 적 있다. 당시에는 속상한 마음뿐이었는데, 일곱 가지 요소에 맞춰 글을 정리한 뒤 내 생각을 덧붙여 써봤다. 친구들의 공감을 얻었고 부모님의 입장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고 했다.
짧은 글을 1년 동안 꾸준히 써보며 아이들은 성찰하는 힘을 키웠다. 감정 글쓰기를 하면서 주변 친구들의 고민과 학교생활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황 교사는 “북적북적에서 한 달에 책 3권을 읽고 그 가운데 1권을 추천하는 ‘독서카드’를 만든다. 카드에는 ‘기억하고 싶은 책 속의 문장’을 비롯해 감정 글쓰기에서 다룬 ‘선입견’, ‘용기’ 등 열쇳말을 적는다”며 “감정 글쓰기 마지막 단계로 독서카드 수정하기를 진행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무릎 딱지>라는 그림책을 읽은 뒤 모둠별로 글감을 고릅니다. ‘마음이 아프다’라는 글감을 정한 뒤 감정 글쓰기를 마치면, 주변에서 ‘마음이 아픈 상황’에 놓인 학생을 떠올려보며 추천의 말을 쓰는 등 독서카드를 수정하는 것입니다. 수정한 독서카드는 다른 친구들이 볼 수 있도록 교내 화장실 벽면이나 학교 도서관 게시판에 붙여둡니다.”
2학년 김소윤양은 “책 추천은 어른들의 몫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감정 글쓰기 수업을 통해 나의 즐거움, 섭섭함, 걱정 등 모든 느낌을 친구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졌다”며 “읽어온 책을 친구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것도, 글쓰기를 통해 내 감정을 살펴봤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고 했다. “<열다섯, 교실이 아니어도 좋아>를 읽고 독서카드 열쇳말을 ‘하루가 길다’로 정했어요. 이 책은 긴 하루를 보낸 친구에게 건네주고픈 책이었습니다. 교복이 아닌 작업복을 입고 일터로 나간 주인공 ‘관의’의 모습에서 긴 하루의 고단함이 느껴졌거든요. 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려운 관의가 현실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나와요. 긴 하루를 씩씩하게 이겨내보자고 저 스스로 다짐하게 됐죠.”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